재회
딱복2025-04-25 01:00

“근데 자기는 그 사람 정말 좋아하나보다.”

련이라는 가명을 쓰는 호스트가 반쯤 취한 낯으로 말했다. 원청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눈을 둥그렇게 뜨고 말았다. 

“내가, 누구를?”

“그 희라는 애.”

“그런가?”

련은 독한 위스키를 한 입에 털어 넣고는 웃었다. 아주 뻔한 질문을 받은 사람이 으레 그렇듯이.

“안 좋아하는데 이렇게 돈을 뿌려 가며 수소문을 해?”

“그런가….”

다시 웃음소리. 련은 자신보다 연상인 원청을 어린애 보듯 보며 술잔을 손 안에서 굴린다.

“그런 거야.”

“…그렇구나.”

“그래.”

 

집으로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원청은 재킷도 벗지 않고 곧장 침대에 쓰러졌다. 간만에 과음을 했더니 머리가 멍하고 볼이 화끈거렸다. 이름도 가물가물한 호스트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내가 좋아한다고, 구영을? 그것도 정말이라는 단어가 붙을 만큼?

원청은 베개에 낯을 부비며 미간을 찌푸린다. 그런가.  하지만 좋아하는 마음이라던가 달콤한 로맨스 같은 것은 원청이 아닌 영에게 필요한 말이었다. 원청은 영이 사랑을, 그에게로 쏟아지는 누군가의 마음을 간절하게 원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닭장같이 좁아터져서는 삭막하기 그지없는 동네에 살면서도 영은 사랑을 바랐다. 언젠가는 그에게도 애정이 주어지기를 원해 왔다. 그런데 이상하지. 좋아한다는 말은 원청에게 먼저 찾아왔다. 그것은 원청을 거쳐 영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가….”

원청은 바보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자신을 통해 영에게로 흘러가는 마음에 대하여 멍한 머리로 곱씹으며.

“나는 걔를 좋아하는 건가.”

말하고 보니 그런 것 같았다. 어떤 감정은 입 밖으로 내야 확실해지는 모양이었다. 원청은 영을 좋아했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렇구나.”

아까 했던 말을 계속 반복하는 기분이었다. 원청은 련이었나 륜이었나 하는 이름의 호스트를 마주본 채 멍청한 낯으로 내뱉었던 말들을 되새김질한다. 그런가. 그렇구나. 나는 그 애를 좋아하는구나.

영은 원청과 눈을 마주하면 으레 눈살을 찌푸리고 욕을 했다. 자신 앞에서는 짜증스러운 기색을 숨기는 법이 없었다. 영을 생각하니 욕설과 신경질만 떠오르는 것은 그래서였다. 원청은 저도 모르게 큭큭대며 웃었다. 그 애를 떠올리니 웃음이 나왔다. 왜일까? 그래, 이건 분명….

“보고 싶다.”

 영이 그리운 까닭이었다.

 

원청은 지독한 숙취에 머리를 부여잡으며 깨어났다. 창문을 반쯤 가린 블라인드 너머로 쨍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정오가 가까웠다. 그는 목적도 없이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다가, 충동적으로 항공사 어플리케이션을 설치했다. 상하이 행 티켓을 예매한다. 당장 오늘 저녁에 출발하는 항공편이었다. 원청은 벌이가 좋은 편이었으나 계획적인 사람이 못 되었기에 잔고가 간당간당했다. 그는 상하이에서의 계획이나 미래에 대한 염려를 시원스레 접어 버린다. 어차피 돌아올 생각은 없었다.

짐을 꾸리는 대신 느긋하게 식사를 하고, 적당히 멋을 내어 입은 후 공항으로 출발했다. 홍콩은 겨울에도 매섭게 춥지 않았다. 그러나 상하이는 이보다 추울 테니 가서 겉옷을 하나 사자. 그 정도로 충동적인 여행길이었다.

홍콩에서 출발해 상하이까지는 두 시간 사십 분. 영화를 보거나 잠을 자기에는 애매했다. 원청은 이코노미 석의 좌석 시트에 등을 기대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것 외에는 달리 할 것이 없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하늘은 검푸르고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상하이라, 어떠려나.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니 일거리가 나올 구석은 있을 것이다. 적당히 쏘삭여 보면 지금까지 하던 것처럼 정보를 사고팔며 먹고살 수 있겠지.

그러나 상하이에 그가 없으면 어쩐다. 충동적으로 일을 벌여 하늘 위에 앉아 있는 지금에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새삼스러운 일이었다. 염려는 원청의 일이 아니었다. 그 사람이 거기에 없으면 어쩌죠, 하고 묻는 것은 보통 원청의 고객이었고, 그때마다 원청은 그것까지는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선을 그으며 웃었더랬다. 그들이 울음을 터뜨리건 조바심이 나 어쩔 줄 모르건 원청의 알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경찰도 아닌 뒷골목의 정보 브로커를 찾아온 사람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그가 상하이에 없다면, 그를 만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비행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공항에서 택시를 잡아, 가장 놀기 좋은 곳으로 안내해 달라 주문했다. 영이라면 유흥가 중에서도 제일 화려하고 규모가 큰 곳에 있을 것이었다. 이런 주문을 하는 손님이 적지 않은지, 택시 기사는 두말 않고 원청을 유흥가로 데려가 주었다.

홍콩의 유흥가는 눈이 멀 정도로 요란스러웠으나, 상하이도 그에 못지않았다. 아니, 어찌 보면 더 사치스러운 것도 같았다. 원청은 가죽 재킷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번쩍이는 거리를 걸었다. 그의 눈은 쉴 새 없이 전광판을 살피고 있었다. 낯선 얼굴들 뿐이었다. 잘못 찾아온 것인가, 그가 이 생활을 접고 떠나간 것은 아니겠지,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원청은 드물게도 초조해졌다.

그때였다, 저만치 서 있는 대형 전광판에 기막히게 잘 생긴 얼굴이 떠오른 것은. 그였다. 구영. 얼굴 옆에는 다른 이름이 쓰여 있었으나 그렇다고 영을 몰라볼 원청이 아니었다. 그는 한달음에 달려가 지하로 이어지는 출입문을 잡아당기려 했다. 

손잡이를 쥐기도 전에 손목이 붙들렸다. 입구를 지키고 선 경호원이 싸늘한 얼굴로 그를 제지했다. 

“그렇게 후줄근한 꼴로는 못 들어가요.”

원청을 위아래로 훑어본 그가 아니꼬운 어조로 툭 던진 말이 그랬다. 원청은 어안이 벙벙해져서는 그대로 쫓겨나고야 말았다. 구룡성채에 있을 시절에는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고, 홍콩이며 아르헨티나에서도 이 정도 차림새는 별 문제가 안 되었다. 상하이는 그의 생각보다 싸늘한 도시였다.

입구 주변을 맴돌기만 해도 날선 눈길이 날아와서, 그는 근처의 골목에 쪼그려 앉아 있어야만 했다. 잠시 그러고 있자니 손끝과 발끝이 얼얼했다. 내가 왜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때마다 구영의 새치름한 얼굴이 떠올랐다. 불평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예쁜 얼굴 가득 못마땅한 기색을 띠고 종알거릴 그를 생각하니 이 정도쯤은 고생도 아닌 것 같았다.

원청이 이 거리에 도착한 것이 밤 열두 시가 다 될 무렵이었는데, 어느샌가 공기에 새벽 특유의 서늘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시계를 확인하니 네 시 반이었다. 거리에서 헤맨 시간을 제해도 네 시간은 골목에 처박혀 있던 것이다. 오늘은 텄나. 설마 출근을 안 한 건 아니겠지? 내일 다시 와야 하나. 그러면 숙소는 어떻게 하지. 그런 생각을 하며 원청이 몸을 일으키는데, 출입문이 열렸다.

훤칠하니 잘생긴 정장 차림의 남자가 여자 서넛에게 둘러싸인 채 걸어나왔다. 그였다. 구영. 못 만난 지가 이 년은 되었는데 그는 변한 것이 없어 보였다. 아니, 더 잘생겨진 것 같기도 했다. 원청은 오래 앉아 있어 굳어진 다리로 발소리를 죽여 그의 뒤를 따랐다.

구영과 한 무리의 여성들은 유흥가를 가로질러 대로변의 택시 승강장까지 이동했다. 그의 잘생긴 얼굴과 그를 따르는 여자들 탓에 주변의 시선이 전부 쏠리고 있었다. 원청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를 뒤쫓는다. 손님인 듯한 여성들을 하나하나 택시에 태워 배웅한 영은, 택시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진 후에야 미소를 지우고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목을 죄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내리는 그는 피로해 보였다.

오색의 불빛으로 물든 그 옆얼굴은 어색하게 여겨질 정도로 아름답다. 건물의 그림자 아래에 선 원청은 그를 잠시 바라보았다. 이상스럽게도 낯선 기분이었다. 영을 만나기 위해 천 이백 킬로미터를 날아와 놓고서는.

그러나 원청은 언제나 그렇듯 생각을 접고 행동했다. 영이 그리웠으니, 그를 만나야 한다. 그를 보았으니 이제는 인사를 해야 한다. 단순하고 명쾌한 결론이었다. 원청은 가뿐한 걸음으로 그를 향해 걷는다. 때맞추어 몸을 돌리는 그에게 웃는 낯으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희야, 안녕.”

이 년 만의 재회치고는 퍽 가벼운 인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