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이 기이하고 불온한 빛깔로 꿈틀거리며 저물더라니, 밤이 되자 때아닌 폭풍과 함께 비가 몰아쳤다. 빗소리는 불길하고 스산하게 들렸다. 작물에 생기를 주기는커녕 시들게 할 것만 같은 비였다. 이런 밤이면 어염집의 사내들은 덧문을 굳게 잠그고 아낙들은 아이를 제 품으로 불러들이리라. 그러나 이토록 차가운 비와 거친 바람도 레농쿠르 후작가의 희고 견고한 담장을 넘지는 못하였다. 간신히 정원 안으로 침입한 바람은 둥글게 다듬은 조경수들을 간간이 흔들고 사그라들 뿐이었다.
오귀스트는 초에 불을 밝힌 채 책을 읽고 있었다. 가지가 세 개로 갈라진 촛대에서 초 세 개가 가느다란 연기를 피어올리며 타올랐다. 그는 막 마지막 장을 넘긴 참이었다. 이제 촛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다.
사위가 고요했다. 오귀스트에게 있어서는 달가운 적막이었다. 레농쿠르의 사용인들은 잘 교육받아 조용하게 움직였으나, 그 수가 적지 않았기에 성 안에는 필연적으로 생기발랄한 소음들이 들리곤 했다. 거의 모든 사용인들이 잠든 지금만이 오귀스트가 고요를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그는 촛불을 집어 끄고 침대에 누웠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알 수 없는 깊은 어둠. 오귀스트는 문득 어떠한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열린 창문 틈으로 불어온 바람이 커튼을 희롱할 때의 소리와 비슷했다. 사르륵, 사르륵, 하는 부드러운 소음. 주기적으로 커졌다가 작아지는….
잠시간 그 소리가 무엇인지 고민하던 오귀스트는 몸을 일으켜 소리의 근원을 찾기 시작했다. 창문이 열린 것이라고 하기에는 방 안이 따뜻하였기에, 그는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복도를 내다보았다.
무언가 흰 것이 복도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오귀스트는 체통 없이 비명을 지를 뻔한 것을 간신히 참고 그 형체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긴 잠옷 자락을 늘어뜨린 여인의 형상이었다. 여인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잠옷이 다리에 스치는 소리를 내며 점차 다가온다. 오귀스트는 무언가에 홀린 듯 문틈에 눈을 댄 채 그를 바라본다.
여인은 긴 복도를 따라 걸어 후작 부부의 초상화에까지 다다른 후 그대로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짚어 걷기 시작했다. 오귀스트는 조용히 문을 닫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깊은 탄식이 쏟아졌다.
이레네아…!
그가 복도의 희미한 달빛을 빌어 확인한 얼굴의 주인은 그의 아내였다. 이레네아는 넋이 빠진 듯 멍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며 복도에 갇힌 듯 한없이 그곳을 맴돌고 있었다. 오귀스트는 피로한 얼굴로 이마를 싸쥐었다.
아내가 점차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해가 갈수록 예민해져만 갔으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눈물을 보이거나 불같이 화를 내기도 했다. 그건 상관없었다. 오귀스트가 이레네아에게 바라는 것은 가문의 안주인 노릇뿐이었다. 그가 이 아름다운 성 안에 갇혀 미쳐 가는 것은 오귀스트에게 있어서는 하등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몽유병 증세를 보이며 성 안을 유령처럼 배회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가문의 안주인으로서의 면이 서지 않잖은가! 분노로 가빠진 숨을 고르던 오귀스트는 필연적인 생각에 빠져든다.
시실리안느였더라면 이러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라면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완벽한 귀부인의 모습을 보여주었겠지. 광증에 빠져 꼴사나운 짓을 하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 시실리안느였다면, 그랬다면….
달콤한 상상에 빠져 있던 오귀스트를 현실로 끌어낸 것은 문밖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음이었다. 이레네아의 다리에 얇은 잠옷 자락이 스치는 소리. 오귀스트는 신경질적인 낯으로 설렁줄을 당겨 하인을 불렀다. 머잖아 도착한 하인은 복도를 떠도는 후작 부인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으나, 곧 오귀스트의 명령에 순종하여 부인을 방으로 모셨다. 오귀스트는 하인에게 무거운 함구령을 내렸다.
다시금 밤의 침묵이 내려앉았다. 오귀스트는 비로소 완벽하게 고요한 순간을 누리며 상념에 빠져들었다. 그는 언제나 감은 눈 속에서 시실리안느의 형상을 보았다. 어느 여름날, 정원을 가득 메우고 피어난 장미 한가운데서 자신을 바라보며 웃던 그녀.
어쩌면 시실리안느가 바라보던 이는 오귀스트의 뒤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있던 음유시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결국 시실리안느를 가진 것은 오귀스트 레농쿠르인데!
그래. 오귀스트 킬리안 드 레농쿠르는 시실리안느를 가졌다. 그가 세상에 남긴 유산을 전부 손에 넣고 그의 그림자를 끌어안은 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시실리안느는 사랑을 쫓아 도망친 끝에 죽어 버렸지만, 결국 사랑의 승리자는 오귀스트였다. 이 땅에 남은 시실리안느의 흔적은 전부 그의 몫이었다.
그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은 채로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었다. 이 성의 지붕 아래에서 이네스가 잠들어 있을 것을 생각하니 한없는 충만감이 샘솟았다. 나의 딸, 나의 작은 새, 나의 사랑의 유산, 나의 승리의 상징. 이네스!
내일은 성으로 재단사를 부르자. 이네스에게 하늘처럼 맑고 푸른 빛깔의 드레스를 지어 줄 것이다. 머리는 반으로 나누어 반은 틀어올리고 반은 그대로 흘러내리게 두어야 한다. 소매를 부풀리고 허리를 졸라맨 드레스는 요즘 유행이 아니라고 했던가? 하지만 반드시 그런 모양의 드레스여야 했다.
햇살 아래서 부드러운 반사광이 도는, 우아한 푸른색의 드레스. 꼭 맞는 허리선 아래로 윤이 나는 스커트 자락이 물결치고 있을 것이다. 구두는 진주를 매단 흰색으로 해야 한다. 그랬던 것으로 기억하니까. 향기로운 머리칼에는 크림색으로 수를 놓은 흰 리본을 매 줄 것이다. 그리고 오후에는 그녀와 함께 장미 정원을 산책하자. 오늘 밤에는 날씨가 궂어도 내일은 해가 날 것이다. 본디 이맘때의 날씨란 변덕스럽기가 그지없으니 괜찮으리라. 비가 지나가 쾌청한 하늘 아래 그녀와 팔짱을 끼고 걸으면 분명 근사한 기분이겠지. 그녀는 이전의 그녀가 그러했듯 장미꽃 사이에서 오귀스트를 향해 웃어 줄 것이다.
달콤한 상상들이 두서없이 떠올랐다가 사그라들기를 반복하고, 오귀스트는 미소를 띤 채 잠에 들었다. 더는 누구도 그의 잠을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사랑의 승리자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