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 밑의 핏자국
딱복2026-01-07 18:54

이것은 성전이다. 인류의 진보와 발맞추어 이어져 온 이 지난한 싸움의 역사는 십수 년 전의 ‘푸른 밤’ 사건 이후로 더욱 격렬해져만 가고 있었다. 싸움의 끝에는 종말 혹은 승리만이 존재한다. 전선이 고착되고 휴지기가 찾아왔다고 느껴지던 순간에도, 이 위대한 전투는 멈춘 적이 없었다. 인간과 악마와 네피림은 한데 뒤엉켜 죽어갔다. 그리고 루인 라이트는 그것에 별다른 불만은 품은 적이 없는 남자였다. 

그의 뒤틀린 자아는 운명처럼 부여된 군인의 역할을 제법 잘 받아들였다. 악마와 인간을 손에 쥐어 굴리고 주무르는 것은 루인의 적성에 맞았다. 삶은 재미있었다. 전장의 복판에서 재미를 느끼는 것은 어쩌면 부적절한 일일지도 모르겠으나, 루인에게 윤리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즉, 루인 라이트는 군인으로서의 재능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는 유능하고 똑똑했으며, 충분히 비정하고, 넘치도록 무심했다. 그를 사랑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은 그를 염려했으나, 루인은 단 한 번도 그것에 감흥을 느낀 적이 없었다.

누군가를 염려한 적도, 마찬가지로 없었다.

 

루인 라이트는 병실 한가운데에 놓인 침대맡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정십자 학원에서 제휴를 맺었다고 하는 대학병원의 일인실은 루인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호화스럽고 깔끔했다. 간호사들은 루인을 세키코의 병실로 안내하며 몇 번이고 당부했었다. 간신히 안정을 찾아 일반 병실로 옮긴 참이니 위생에 각별히 신경을 써 달라고.

흰 베개 위로 흩어져 있는 새빨간 머리카락은 세키코의 갸름한 얼굴을 파리할 정도로 창백해 보이게 만들었다. 눈을 감고 가느다란 숨을 쉬고 있는 그녀는 피로해 보였다. 평소의 웃음이 사라진 탓이리라. 루인은 세키코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불 위로 드러난 오른손을 쥐어 보았다.

뜨겁다고 느껴질 정도로 높은 체온. 세키코가 병원으로 이송되었을 당시 그녀의 체온을 잰 의료진들은 깜짝 놀랐었다고 한다. 현장에서 응급 처치를 마치고 그녀를 병원으로 옮겼던 중년의 엑소시스트가 그 이야기를 전하며 조금 웃었더랬다. 세키코의 피로 손을 물들인 채, 지친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그가 무어라고 말했었더라.

아베노 씨는 강한 사람이니 금방 나을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세키코의 손을 잡은 채 과거의 일을 되짚어보던 루인은, 자신이 지금 기분이 상해 있음을 깨달았다. 낯선 기분이었다. 비유하자면, 엉망진창이지만 나름의 질서를 가지고 있는 그의 방 안에 갑자기 처음 보는 물건이 나타난 것만 같다고 할까. 루인 라이트는 자신의 지성을 믿었으며 자신의 본성도 제법 잘 알았다. 그러니 이 감정은 명백하게도 이질적인 것이다. 루인은 세키코의 둥근 손톱을 찬찬히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나는 지금 걱정을 하고 있나? 이 걱정이란 것이 저 사람에게도 보일 정도로 드러났단 말인가? 루인 라이트가 아베노 세키코의 부상을 그 정도로 염려하고 있는 것인가?

사랑이라는 것은 본디 이러한 것인가?

세키코의 손톱 아래에는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전 인류의 운명을 걸고 행하는 성전에 비하면 아베노 세키코의 부상은 사소한 것일 터였다. 마치 그녀의 손톱 아래에 남아 있는 작고 붉은 흔적처럼. 그러나 루인은 그 손끝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오래된 장서에서 묻어난 티끌과 흙먼지 따위로 지저분한 자신의 손으로 세키코의 손끝을 닦아 내며, 루인 라이트는 생각한다.

사랑이라는 것은 불합리하다. 이것은 루인 라이트라는 한 인간의 사고에 변수를 수도 없이 끼워 넣으며 생각을 어지럽힌다. 사소한 걱정과 살뜰한 애정 따위를 알지 못하던 그에게 무용하고 부드러운 것들을 가르친다.

뒤를 돌아보게 만든다. 곁을 내어주게 만든다.

염려하게 만든다.

세키코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곧 그녀가 눈을 떴다. 

“루인?”

“그래, 세키코.”

“시간이 얼마나 지났어?”

“으음, 사흘 정도? 크게 다쳐서 오래 수술해야 했으니까. 간호사 부를까?”

세키코가 웃는 낯으로 고개를 저었다. 루인은 그녀의 손을 바투 쥐며 의자를 끌어 다가앉았다.

“배고프지 않아? 간호사를 불러야 밥도 주고 약도 주고 할 텐데.”

“잠깐만 이러고 있자.”

“그래, 슈알. 자다 깨서 그런가 어리광이 늘었네.”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보인 게 너라서 그런가 봐. 기분이 좋아졌어.”

루인이 작은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눈가를 덮은 머리칼 사이로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지는 것을 바라보던 세키코가, 평온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를 걱정했어?”

짧은 침묵. 세키코는 루인의 눈매에서 서서히 웃음기가 사그라드는 것을 본다.

“그랬던 것 같아.”

머뭇거림이 담긴 목소리였다.

“계속 말해 봐.”

“너를 걱정했어. 세키코를 만난 이후로 이렇게 크게 다친 건 처음이었잖아. 그래서…. 염려했어.”

세키코의 눈매에 환한 웃음기가 맺혔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선물을 받은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눈을 감으며 베개에 깊이 고개를 묻었다.

“더 말해 줘.”

“너를 응급처치했던 닥터가 그러더라. 너는 강한 사람이라고, 금방 나을 거라고, 염려하지 말라고. 그런데 기분이 나빠지더군.”

“왜 그랬어?”

“너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네가 금방 나을 거라고 말하는 게 싫었어. 그리고 내가 세키코 너를 걱정하고 있다는 게 낯설었어.”

가랑비 같은 웃음소리. 세키코가 루인의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밀어넣어 깍지를 꼈다.

“있잖아, 세키코.”

“그래, 루인.”

“안아 줘.”

먼지투성이 겉옷을 걸친 루인은 겁도 없이 병원 침대 위로 기어올라 세키코를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세키코의 환자복이 금세 흙먼지로 엉망이 되었지만 둘 중 누구도 그것을 신경쓰지 않았다. 루인은 세키코의 목덜미에 이마를 기댄 채 웅얼거렸다.

“망가지지 마.”

루인의 등에 팔을 둘러 안은 세키코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제일 좋단 말이야.”

“그래. 나도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