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
딱복2025-04-25 00:56

먼 곳에서 바라본 알라미고의 성채는 어렴풋한 녹색이 뒤섞인 황톳빛이었다. 봄이 다가와 산등성이에 잡풀이 자란 것이다. 산어귀 들판에 아지랑이가 피어 성의 윤곽을 흐리게 만들고, 능선을 따라 성채로 향하는 사람들이 아주 작은 얼룩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싱그럽고 따스하다. 긴 여행 끝의 귀향에 어울리는 날씨였다.

카토라 불렸던 라간프리드는 무릎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주어진 휴식 시간이 끝난 참이었다. 몸을 단련하지 않은 민간인이 대부분인 탓에, 여행자 무리는 휴식을 자주 가지며 움직여야만 했다. 여정은 느렸으나 누구도 그것에 불평하지 않았다. 에오르제아로부터 시작한 이 기나긴 이동에 지쳐 불만을 말할 여력도 없었던 것이다.

여행자 무리는 어린이와 노인이 섞인 구성이었으며 다들 끔찍할 정도로 피로에 절어 있었다. 한 사람도 낙오되지 않은 것이 기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피체티의 공이었다. 세월은 피체티의 혈기를 노련함으로 바꾸고 그를 어엿한 길잡이로 만들어 놓았다. 라간프리드는 잔주름이 패이기 시작한 그의 얼굴을 볼 때에 이따금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느끼곤 했다.

“자, 출발합시다! 오늘이면 알라미고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피체티의 말에 사람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걷기 시작했고, 라간프리드는 무리의 가장 후방에서 가장 걸음이 느린 자와 보조를 맞추었다. 라간프리드보다도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남자는 그에게 몇 번이고 감사 인사를 했다. 두고 가지 않아 주어서 고맙다고, 고향으로 갈 수 있도록 해 주어서 고맙다고….

라간프리드는 그의 말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은 채로 묵묵히 걸었다. 기실 감사를 받기에도 이상한 일이다. 저 노인이 그가 누구이고 무엇을 하며 살아온 사람인지를 알았더라면 인사 대신에 침을 뱉었을 것이다.

그러나 카토라 불렸던 이는 후회하지 않는다. 그의 후회가 향하는 곳은 이편이 아니었다. 노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며, 그는 생각한다. 그 순간에 그렇게 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때에는 그렇게 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렇게 했더라면, 세상을 불태우던 전쟁의 불꽃이 더 오래 타오를 수 있었을까?

십수 명의 사람들이 완만한 산길을 걷는다. 겨울의 침울한 색조가 가신 숲은 움트는 꽃망울과 여린 나뭇잎으로 화사했다. 가지와 잎사귀 사이로 볕뉘가 내려 사람들의 머리칼을 반짝이게 만들고 있었다. 가장 어린 열 살배기 소녀가 뛰듯이 걸으며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어른들이 웃었다. 아이의 아버지가 가슴 벅찬 목소리로 말한다.

“얘, 라우라. 우리는 고향으로 가고 있는 거야!”

그 순간, 라간프리드는 전쟁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꺾이고 휩쓸리며 죽어가는 사람들과 그들이 입속에 숨기고 있었던 비밀들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었다. 전쟁은, 투박하게 말하자면 앎의 싸움이다. 어느 편이 무엇인가를 더 많이 알고 있으면 그들은 승리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서로의 비밀을 왜곡시키기 위하여 그리도 애쓰는 것이다.

라간프리드는 그 일련의 과정을 누구보다도 즐기며 수행하던 사람이었다. 비밀을 손에 쥐고 휘두르는 순간 그는 강해진다. 하나의 인간을 초월해 수백 수천의 목숨을 쥐고 흔드는 자가 되는 것이다. 앎을 궁구하는 것은 산 자의 본능이고 투쟁을 향한 욕구 그 자체이다. 살아가려면 알아야 한다. 알아내려면 살아야 한다. 적어도 라간프리드의 삶은 그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문득 산새가 울었다. 라간프리드는 백일몽에서 깨어나 자신을 세 발짝쯤 앞선 노인의 등을 바라본다. 그는 노인의 걸음에 따라붙으며 자조했다. 이미 전쟁은 끝이 났고 라간프리드의 삶에서 가장 치열하던 때는 떠나갔다. 그는 평화에 적응하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어떠한 앎은 지저에 묻혀야만 함을 그는 알았다. 산길을 걸으며, 사람들은 함께 노래하고 있었다. 라우라가 부르던 알라미고의 옛 노래였다.

라간프리드는 돌아갈 집이 없는 탓에 스물이 되도록 그 노래를 몰랐었다. 모른 채로 어른이 되었다. 그가 그 노래를 처음 들은 것은 스물두 살 무렵이었다. 피체티를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히고 머리를 땋아 리본을 매달아 주었는데, 그때에 그 애가 이 노래를 불렀다. 알라미고의 황톳빛 산에 봄이 찾아오는 때에 대한 노래를.

그러나 라간프리드는 노래하지 않는다. 그는 침묵을 지키며 걸었다. 영영 닿지 못할 듯 멀어 보였던 산과 성채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몇 시간만 더 걸으면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고향 알라미고에. 꼬마 라우라가 신이 나서 ‘고향’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에오르제아에서 태어나 에오르제아에서 살았을 것이 분명한 그 애는 알라미고를 고향이라 불렀다. 라간프리드는 고향이라는 것이 땅이 아닌 사람의 마음 속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자신의 고향은 전쟁의 겁화 속에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바람. 부드럽고 달콤한 봄의 바람. 저만치 솟은 성채로부터 불어오는 그것은 제국의 바람과는 다른 향을 품고 있었다. 땀에 젖은 이마가 서늘해졌다. 노래를 마친 사람들은 새로운 힘을 얻어 즐겁게 걷는데, 라간프리드는 그들을 아주 먼 곳에서 보듯 본다.

마침내 풀이 웃자란 황톳빛 산.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말을 멈추고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이 산 꼭대기에 고향이 있다. 그러나 라간프리드에게는 그저 토산일 뿐이었다. 길잡이를 하기 위해 십 수 번을 오르내린, 봄을 맞아 풀과 꽃이 자라기 시작한.

지쳐 비틀거리는 노인을 끌어 주며 산을 오른 끝에 성문에 도착하였다. 성문을 지키던 경비대원들이 환하게 웃으며 귀향자들을 맞이하고, 인근의 주민들이 몰려나와 환호를 올렸다. 길잡이 피체티와 그의 일은 알라미고 내에서도 유명했다.

라간프리드는 그 모든 광경을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았다. 마침내 고향에 돌아온 이들은 다시금 알라미고의 옛 노래를 부른다. 울고 웃으며 서로를 끌어안고 등을 두드린다. 피체티는 쏟아지는 인사 속에서 태양처럼 환히 웃고 있었다.

오직 그만이 아무런 표정 없는 낯을 한 채 태양 아래의 그림자처럼 고요했다. 라간프리드는 성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하고 몸을 돌렸다. 그가 떠나는 것을 본 노인이 다시금 고맙다고 외쳐 불렀다.

라간프리드는 돌아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