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밤의
딱복2025-04-25 00:57

미케일라는 눈앞에 드리운 포도줏빛 커튼을 살며시 젖히고 테라스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반남짓 열린 문틈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갑갑한 실내의 공기를 몰아내었다. 그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싶지 않아 재빨리 테라스로 빠져나간다.

커튼을 치고 문을 닫으면 이곳은 완전히 분리된 공간이 되었다. 저편의 빛과 소음이 먹먹하게 잦아들고, 어둠과 정적 속에서 밤새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별이 총총한 하늘, 그리고 풀과 나무의 향기. 그제야 숨을 쉬는 것 같았다. 그는 오래 쫓기다가 마침내 안전을 보장받은 사람처럼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 아래를 졸라맨 드레스는 백 년 전에 유행했다던 디자인보다야 편했지만 숨쉬기에 거슬렸다. 간만에 정성스럽게 매만진 머리카락도, 분을 바르고 연지를 칠한 얼굴도, 하나같이 어색하고 짜증스러웠다. 어서 돌아가 편한 옷을 입고 엎드려 책을 읽고 싶었다. 부모님의 강권이 아니었더라면 이깟 무도회에 참석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미케일라는 춤도 왈츠도 사교적인 행위도 질색이었다. 그는 소설가를 꿈꾸는 문학도였고, 아주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책벌레였다. 백작 부부의 근심과 걱정을 한 몸에 받는 골칫거리임은 물론이다. 데뷔탕트조차도 어머니의 손에 억지로 이끌려서 치렀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작위를 가진 귀족 집안의 적녀가 사교 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사실상 직무 유기나 마찬가지였다. 보통의 집안이었다면 호되게 야단을 맞거나 벌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미케일라의 부모는 한숨만 푹푹 내쉴 뿐 그를 탓하지 않았다. 그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미케일라가 어째서 책 속으로 도망쳐 버렸는지를.

순식간에 기분이 곤두박질쳤다. 미케일라는 눈썹을 찌푸리며 연지 발린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드레스만 아니었더라면 진작 테라스의 난간을 넘어 도망쳤을 것이다. 몸에 휘감고 있는 장신구 중 귀걸이 하나만 떼어 건네도 삯마차를 잡아 탈 수 있음을 그는 알았다. 미케일라는 몇 번인가 자신 몫의 보석을 들고 타운하우스를 뛰쳐나간 전적이 있었다. 그는 실내복 차림으로 너절한 서민들의 거주 구역을 돌아다니다가 백작 내외의 명을 받은 풋맨들에게 붙잡혀 돌아가곤 했다.

그는 난간에 등허리를 기대고 고개를 젖힌다. 하늘에 별이 빼곡하였다. 기댄 등으로 대리석의 찬기가 전해졌다. 여기서 시간을 때우다가 음악이 멈추면 무도회장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그러기에는 조금 추웠다. 초여름이라고는 하나 밤공기는 서늘하였다. 미케일라가 감기에 걸릴 각오를 굳히던 그 순간, 남자의 손이 커튼을 젖히는 것이 보였다.

아뿔싸! 문을 이쪽에서 잠가 둘 것을. 뒤늦게 후회하였으나 이미 테라스의 문이 열린 뒤였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말소리, 수십 가지의 향수가 섞인 냄새 따위가 밀려들어왔다가 문이 닫힘과 동시에 잦아들었다. 테라스에 들어선 사내가 혀를 찼다.

“이런, 선객이 있었군.”

미케일라가 아는 얼굴이었다. 모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세인트 앨번스 후작, 레녹스 피츠로이가 나타난 것이다. 미케일라는 황급히 치맛자락을 벌려 쥐며 예를 차렸다.

“아, 그만하지. 테라스에서 절을 올리는 것은 우습잖아?”

미케일라가 숙였던 허리를 어정쩡하게 들어올리자 레녹스가 조금 웃었다.

“네, 전하….”

“자네는 아가일 백작가의 영애였지?”

“네.”

“영애도 파티가 지겨웠던 모양이군.”

네, 하고 대답한 미케일라가 속으로 의외라는 생각을 한다. 그가 눈앞에 선 국왕의 사생아를 대단히 잘 아는 것은 아니었으나, 저 남자가 향락적인 성격의 한량이라는 사실은 사교계에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저런 사람도 무도회가 지겨워질 때가 있구나 하는 감상과 함께 눈을 굴리던 미케일라가 쭈뼛거리며 입술을 떼었다.

“저어, 자리를 비켜 드릴까요, 전하? 제가 방해가 되는 것 같아서….”

“아냐, 여기 있게. 비켜도 나중에 온 내가 비키는 게 맞지. 괜찮다면 말상대나 해 주겠어?”

부모의 말은 안 들을 수 있으나, 왕자의 말을 거절하는 것은 역시 어렵다. 미케일라는 나지막하게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한다.

“그런데 영애는 왜 여기로 도망을 나와 있지? 무도회가 재미없나?”

미케일라는 주름 하나 없는 치맛자락을 괜히 매만져 정리하며 말을 고른다.

“저는…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어서요. 신사들과 대화하고 춤을 추는 것보다는 책을 읽는 게 더 좋아요.”

“그래? 영애 나이또래의 소녀들은 다들 춤 추는 것을 좋아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레녹스의 말에 미케일라는 새삼 그가 자신보다 열 살 가량 연상이라는 것을 자각하였다. 다시금 치맛자락을 매만지는 손길.

“아뇨, 전하. 저는 역시 책이 더 좋아요.”

“그렇군, 나도 책을 좋아해. 셰익스피어는 당연히 읽어 보았겠지?”

“그럼요! 모든 글을 전부요. 소네트도 전부.”

“이런, 대단한 애서가였군. 가장 재미있게 읽은 작품을 말해주겠어?”

“햄릿이에요.”

“영애가 읽기에는 너무 슬픈 글이 아닌가?”

“재밌던걸요. 저는 국왕의 유령이 나오는 부분이 가장 좋았어요.”

“그건 어째서지?”

미케일라는 잠시 망설인다.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솔직하게 말하면 왕자 전하가 꺼림직하게 여길 것 같아 그랬다. 그러나 초여름 밤의 서늘하고 향기로운 공기가 마법을 부린 것일까? 미케일라는 진실해지기로 한다.

“유령이 있다면, 언니를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까요.”

레녹스가 눈을 깜빡였다. 그는 어디선가 들었던 가십을 떠올린다. 그래, 그랬지. 아가일 변경백에게는 딸이 둘 있었다고 했어. 그런데 장녀가 목숨을 잃었다지.

“언니와 가까웠나보군.”

“자매들이 으레 그렇듯이요.”

“가깝지 않은 자매나 형제도 많지 않나? 영애의 눈 앞에도 하나 있고.”

미케일라가 깜짝 놀라 입술을 가린다.

“어머, 죄송해요! 그런 의도가 아니었어요.”

“하하! 아니야, 아니야. 내가 짓궂었소, 영애. 장난을 좀 치고 싶은 기분에 그만.”

아가일 변경백의 장녀가 요절했다는 이야기가 돌아봤자 국왕의 사생아들에 대한 이야기만 할까. 그러나 미케일라가 보기에 레녹스는 자신의 이복형제들에 대해 별로 신경쓰고 있지 않은 듯 했다.

“전하께서는, 형제분들과 그다지 교분이 없으신 모양이에요.”

이름과 얼굴만 겨우 아는 사이에 하기에는 부적절한 질문이었으나 레녹스는 개의치 않았다. 그 또한 밤공기가 불러온 마법에 걸린 것일까.

“아무래도 그렇지. 접점도 없을뿐더러 성향도 달라서 말이오. 나는 정쟁에도 사교에도 관심이 없어. 예술을 즐기는 것이 제일 즐겁더군.”

미케일라는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예의를 전혀 차리지 않은 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마 이 또한 밤공기 탓일 것이다. 물속에서 듣고 있는 것만 같이 아스라한 음악 소리와 거품처럼 잦아드는 소음들, 그리고 세상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듯 어둠 속을 표류하는 좁은 공간 따위가 그들을 편안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리라.

미케일라는 자신이 입밖으로 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던 말을 꺼내 놓는다.

“그런데 전하. 사실 저는, 책으로 도피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요.”

레녹스는 대답 대신 왼눈썹을 치켜올렸다.

“저희 언니가 떠나간 후로… 책을 아주 많이 읽기 시작했거든요. 어딘가 의지하고 몰두할 곳이 필요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

미케일라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제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망설이듯 말했다. 레녹스는 대화의 행간에서 미케일라의 언니 릴리어스가 왜 죽게 되었는가를 어렴풋이 눈치챘다.

“그렇게 따지자면 나도 마찬가지인걸.”

레녹스는 가벼운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미케일라가 고개를 든다.

“내가 만일 부왕의 적법한 자식이었다면 이토록 쾌락에만 고개를 처박은 채 지냈을까? 글쎄. 아마 아닐 것 같군. 인간이라면 누구나 욕망을 가지고 있잖소. 또 모르지, 내가 왕위를 향해 돌진했을지도.”

미케일라는 그것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듯 웃었다. 아직 어린 태가 나는 소녀의 얼굴에서 침울함이 걷히자 보기 좋았다. 레녹스도 마주 웃었다.

“그래도 영애가 책을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잖소?”

“그럼요. 그것만큼은 사실이에요. 그리고, 비밀이지만… 저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전하. 소설을 쓰고 싶어요.”

“정말이오? 이거 근사한걸.”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허무맹랑하다고 여기지는 않으시나요?”

“전혀.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지 얘기해보시오.”

미케일라가 우아하게 다듬은 머리칼을 매만지며 엷게 웃었다.

“아직은 정하지 못했어요. 처음으로 쓰게 될 글에 대해서는요. 아주 신중하게 정한 후에 시작하려구요.”

레녹스는 눈앞의 소녀를 퍽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테라스에서의 대화는 짧았지만 진실되었고, 대화의 과정 속에서 레녹스와 미케일라는 서로를 꽤 잘 알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약속을 하나 할까. 영애가 정말로 소설가로 등단한다면 내가 영애의 후원자가 되어 주겠소.”

미케일라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레녹스를 바라보았다. 레녹스는 정말이라는 말 대신 미소지었고, 미케일라의 얼굴이 꽃처럼 환하게 피어났다. 그는 왕자가 자신의 후원자가 되어 주겠노라고 약속한 것보다 레녹스라는 한 사람이 자신의 꿈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주는 것이 기뻤다.

“제가 소설을 쓰고 싶다는 말을 했을 때 이렇게나 응원해주신 분은 전하가 처음이에요. 부모님께서는, 아무래도 내키지 않아 하셨거든요.”

“본디 부모라는 존재가 그렇지. 부왕께서도 똑같다오. 내가 하는 일 중 그분 마음에 차는 일은 없을걸.”

미케일라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레녹스도 그를 따라 웃는다. 퍽 유쾌한 기분이었다. 마치 어린 시절 어른들에게는 비밀로 하고 장난을 꾸몄을 때 같았다.

“이렇게 보니 우리에게는 공통점이 제법 많군, 영애.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소.”

“저는 백작가의 여식인데도요?”

“그런 것을 신경쓰기에는 내가 좀 많이 난봉꾼이라오.”

다시금 웃음소리. 그들은 커튼 너머로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입술을 가린 채 웃었다. 미케일라가 장갑에 입술연지를 묻힌 탓에 또 와그르르 웃고야 만다.

답답한 정장과 드레스 아래 갇힌 몸이 당기도록 웃은 그들은 시간이 꽤 지난 듯 해 무도회장 안을 기웃거려 보았다. 음악 소리가 잦아든 것이 거의 파장 분위기인 듯 했다. 이크, 하며 레녹스가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내가 먼저 나가보겠소. 지금쯤이면 찾는 사람이 생겼을 것 같거든. 영애는 더 있다가 나오시오.”

“네, 전하. 덕분에 즐거웠어요.”

그들은 제대로 된 인사 없이 작별한다. 레녹스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무도회장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미케일라는 웃음으로 가빠진 숨을 고르며 먼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레녹스를 만나기 전에는 몸이 서늘했으나 신나게 대화한 덕인지 이제는 춥지 않았다. 미케일라가 웃음기를 띤 채 중얼거렸다.

“참 이상한 분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