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희왕 구영은 퉁퉁 부어 제대로 뜨이지 않는 눈꺼풀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이토록 불쾌한 기상은 처음이었다. 온몸이 쑤시는데다 피부가 불쾌하게 끈적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하체의 이물감과 통증까지.
최악의 아침이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지. 영은 눈을 반만 뜨고 침상 옆을 더듬어 협탁 위의 자리끼를 들이켰다. 목을 축이자 정신이 조금 드는 것 같았다. 그래, 혼례를 치렀지. 붉은 옷을 입은 오랑캐 공주와 합환주를 마셨고. 그와 함께 침궁에 들어와서….
“헉…!”
얼음물을 등줄기에 가져다 부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기운이 달아나 정신이 명징해지자 허리에 감긴 팔이 의식되었다. 살갗이 거칠고 단단한 그 팔. 사내의 것이다. 새벽닭이 울 때까지 영을 범하고 또 범하던 그 사내의. 영은 기겁하여 사내의 팔을 풀려 하다가 침상 아래로 고꾸라질 뻔 하였다. 굴러떨어지려는 영의 몸을 낚아챈 사내가 쉰 소리로 웃었다.
“조심해야지, 낭군님.”
영보다 손가락 두 개는 작은 사내는, 그러나 놀랍도록 힘이 셌다. 그는 영을 번쩍 들어다 침상에 다시 눕혀 놓고 냅다 끌어안았다. 영은 사내의 얼굴을 마주보고서야 그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류원청.”
“내 이름을 기억하는군. 이거 참 기쁜걸.”
말문이 턱 막혔다. 지금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느냐고 따져야 할지, 방금 나를 낭군이라고 부른 것이냐고 되물어야 할지, 아니면 소리쳐 하인들을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영이 입술만 뻐끔거리는데, 원청은 태평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며 늘어졌다.
“내 목을 치려거든 한 다경만 기다려 주겠소? 아직 너무 피곤해서 말이지.”
그 말 끝에 희미하게 공포가 묻어나지 않았더라면, 영은 당장 하인을 불러 이자를 끌어내라 명했을 것이다. 그러나 원청은 정말로 피로해 보였다. 생각해 보면 그는 오랑캐의 땅에서부터 신부의 예복 속에 스스로를 숨기고 긴장 상태를 유지해왔을 것이다. 목을 칠 때는 치더라도 조금 쉬게 하자. 어째서 이런 무도한 일을 저질렀는지 이유라도 들어 보고. 이런 생각이 들자 영의 몸에서 긴장이 빠져나갔다. 원청이 그를 바투 안았다.
“팔 좀 풀어 보시오. 잠들지도 말고. 변명할 기회를 줄 터이니.”
원청이 조금 멍청한 낯으로 눈을 깜빡였다. 사실 그는 지하 뇌옥에서 눈을 뜰 각오를 마친 상태였다. 신부로 위장하고 왕부에 숨어든 오랑캐. 불문곡직하고 잡아다 가두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왕야와 정사를 치르고 그대로 잠든 것은 원청이 스스로를 이미 죽은 자라 여기고 있던 까닭이었다.
그랬다. 원린을 대신해 죽으러 온 길이었다. 여동생은 제국까지의 여정도 이국에서의 결혼 생활도 버틸 수 없는 아이였다. 그러나 제국에서 내민 손을 쳐낼 수는 없는 노릇. 원청은 자신이 신부 노릇을 하겠노라 자원했다. 침궁에 들어 멱리를 거둔 후 무릎을 꿇고 빌 요량이었다. 감히 왕야를 능멸한 죄를 청하며, 그러나 동생을 위해 저지른 짓이니 이 목을 거두는 것으로 갈음해 달라 애원할 생각이었다.
“잠깐. 죄를 청할 생각이었다고?”
“으하하….”
사뭇 진지하게 사연을 늘어놓던 원청이 웃으며 눈을 굴린다. 맨몸에 이불을 감고 침상에 앉아 원청의 이야기를 듣던 영이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죄를 청할 생각이었다고?”
“그럴 계획이었다지 않소.”
“그러면 죄를 청했어야지!”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던 영이 죄 지은 사람마냥 목소리를 죽였다. 소란을 피워 하인들의 관심을 끌면 당장 눈앞의 사내를 죽여야만 하니 어쩔 수 없었다.
“낭군께서 내 생각보다 미인이어서 말이지. 어쩔 수 없었소. 전투의 경험이 없는 낭군께서는 모르시겠지만, 본디 사내들이 극도의 긴장 상태에 놓이면 성욕이 왕성해진다오.”
“이 미친 작자가.”
진지한 낯으로 누이동생 이야기를 할 때는 언제고 이런 되도 않은 소리를 늘어놓는단 말인가. 게다가 낭군이라니.
“내가 왜 자네 낭군이 된단 말인가.”
“왜냐니. 합환주를 마시고 초야를 치렀잖소. 무를 수 없다고까지 말했건만.”
“하….”
영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미간을 문질렀다. 그를 바라보던 원청이 사람 좋은 낯으로 미소짓는다. 태연한 목소리.
“그러니 지금이라도 부탁하리다.”
“무얼.”
“내 목만 거두어 주시오. 제국이 원하는 것은 우리의 복속뿐이지 않소? 나를 죽이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짓는다면 부족에서도 나서지 않을 거요.”
류원청은 종잡을 수 없는 사내이다. 영은 이 순간 그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육욕 따위에 휘둘려 왕야를 엉망진창으로 범하고, 태평한 얼굴로 죽을 각오를 입에 담고, 이제는 진지한 낯으로 제 목을 건다.
“확답을 줄 수 없음을 모르지 않을 텐데.”
“명희왕부에 대한 황제의 신임이 제법 두텁다 들었는데 아닌가보오.”
쏘아보는 영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원청은 능글맞게도 웃어 보였다. 영은 눈길을 거두고 무언가를 짧게 생각하는 듯 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굳어진 표정을 하고 있었으나 다리가 풀려 꼴사납게 휘청거리고야 말았다. 원청이 잽싸게 영을 부축해 주었다.
“도망치지 말고 여기서 기다리시오. 그대의 처분을 결정한 후 돌아오겠소.”
지난 밤에 입었던 붉은 예복을 대강 여며 걸친 영이 침소를 빠져나가며 남긴 말이었다. 경고하는 어조였으나, 그가 도망치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았어도 원청은 이곳에 있을 것이었다. 도망칠 곳도 달리 없었다.
영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져 들리지 않게 된 후에야 원청은 거한 한숨을 쉬며 침상에 늘어졌다. 아닌 척 했지만 죽도록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입고 왔던 신부의 예복 중 가장 얇고 품이 넓은 옷 하나를 찾아 걸쳐입었다. 창을 열어 하늘을 확인히니 이른 오전이었다.
점심때가 되도록 왕야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새처럼 곱게 치장한 시비 대여섯이 들어와 식사를 차려 주고 씻을 물과 입을 옷을 내주었다. 의외로운 상황이었다. 무장한 병사들이 쳐들어와 몽둥이로 두드려 팬다면 모를까, 식사와 목욕물이라니. 원청은 이것을 긍정적인 신호로 해석해야 할지를 고민하며 주는 밥을 얻어먹었다. 제국의 요리는 확실히 부족의 것보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맛이 났다.
이런 것을 먹고 자라서 왕야의 몸이 그리도 부드러운가 싶었다. 시비가 건넨 옷을 입자 그 또한 매끄럽고 질이 좋았다. 이런 것을 입고 살아서 왕야의 살결이 매끄러운가도 싶었다. 원청이 제풀에 우스워 웃는다. 엎드려 빌어야 할 상대에게 동해 그를 안은 것도 이상한 일인데, 그에게 제 생명을 맡겨 두고도 안을 적의 살결이나 생각하고 있자니 또 이상했다. 그러나 그를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영이 돌아온 것은 늦은 오후 무렵이었다. 격식에 맞추어 차려입고 옥을 깎아 만든 관을 쓴 그는 아주 근사했으나, 떠날 때보다 더욱 피로한 낯빛을 하고 있어 원청을 의아하게 했다. 안색이 나쁜 이유를 물으니 영은 원청의 탓을 한다. 한나절 동안 측근들과 그의 처분을 논했다는 것이다.
“그렇군, 그래서 형은 언제 집행되오?”
“안 하오.”
“아, 그래. 안 하…. 뭐?”
원청이 눈을 둥그렇게 치뜬다. 영은 그에게 한 방 먹인 듯한 기분을 느끼며 씩 웃었다.
“다방면으로 고민한 결과, 귀하의 목을 치지 않기로 했소.”
“대체 왜?”
“기뻐하지 않는군. 이제라도 개작두를 준비해야 하나.”
“아니, 믿기지 않아서 그렇소. 정말로 왜?”
“그대를 죽이는 것이 손해일 것 같아서 그렇소. 그대를 부군으로 맞는 것은 이득일 것 같고.”
그 대답만으로도 원청은 상황을 대강 이해했다. 오랫동안 제국의 눈엣가시였던 부족과 마침내 혼사를 통한 동맹을 맺었는데, 그것을 뒤엎자니 황제의 눈치가 보일 것이다. 어차피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루어진 정략혼. 왕부의 책사들은 이대로 상황을 얼버무리는 편이 낫겠다 여긴 모양이었다. 구명이 확언되자 원청은 금세 느물거리는 태도를 되찾았다.
“아하. 알겠소. 왕야께서 나를 낭군으로 맞아들일 각오를 하셨다 이 말이군.”
흰 낯에 오만하고 사무적인 기색을 띠고 있던 영이 단박에 언성을 높였다.
“말도 아니 되는 소리를!”
“으하하, 수줍음을 타시는군. 부부간에 무어가 부끄러워 내외를 하시나?”
“놓으시오. 개작두를 대령하라 일러야겠소. 이거 놓으래도!”
“부끄러워하지 말고 이리 오시오. 지금 입은 푸른 옷이 아주 근사하게 잘 어울리는걸? 그야말로 왕야다운 기품이 느껴지오.”
“옷이 잘 어울린다면서 왜 벗기는 거요?”
“우린 신혼이잖소. 부부의 일을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