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탄 열 명 안팎의 기사들이 평원 저편으로부터 다가온다. 선두에 선 기사가 깃발을 들고 있었기에 그들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다. 성벽의 망루에서 그들을 바라보던 노타리에스 백작은 성문을 열라는 지시를 내리고 몸을 돌렸다. 하늘은 음울한 회청빛이고, 그 아래로 먼지처럼 눈이 내리고 있었다.
망루의 계단을 타고 내려와 성문 앞에 도착하니 때맞추어 문이 열렸다. 기수를 앞세운 기사 무리가 성문을 통과한다. 그들이 속한 가문의 인장을 수놓은 깃발이 무기력한 새의 날갯짓처럼 펄럭이고 있었다. 무리의 중앙에 있던 사내가 말에서 내렸다.
“한니발.”
노타리에스 백작이 사내의 이름을 부르고 짧은 포옹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한니발 또한 퍽 친근한 태도로 그의 이름을 부른다.
“마르코.”
“들어가지. 눈이 거세질 모양이야.”
한니발이 빙긋 웃음지었다. 그의 눈은 흐린 날빛 아래에서 거의 검붉은 색처럼 보였다. 그의 기사가 든 깃발의 색과 흡사한 빛깔이었다.
한니발 렉터는 노타리에스 백작의 사촌이었다. 그는 궁정백의 학자 된 몸으로 수도에 머물고 있었으나 계절에 한 번씩은 백작을 만나러 노타리에스령에 방문하고는 했다. 그러나 성의 하인은 물론 백작의 기사들까지도 한니발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는 눈에 띄는 특징을 가진 남자였으나, 동시에 짧은 말로 단정짓기 어려운 남자였다. 손가락이 여섯 개인 왼손. 붉은 기가 얼핏 비치는 갈색 눈. 박학다식하며 점잖은 사람. 이 모든 단어를 다 합친다 해서 그것이 한니발 렉터가 되지는 못한다.
만일 누군가에게 한니발을 소개해야만 한다면 이 말이 가장 효과적일 것이다.
그는 미식가이다.
파이 껍질 안쪽으로부터 새의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살아 있는 새를 넣은 이 파이는 사치스러운 요리인 탓에 특별한 날에만 만들어졌다. 하인들은 요리를 내가며, 백작이 그의 사촌 형제를 각별하게 생각하는 모양이라고 수군거렸다. 백작이 두꺼운 파이 껍질을 가르자 새하얀 비둘기들이 홰를 치며 날아올랐다. 한니발은 즐거운 듯 웃었다.
식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가장 상석에 앉은 마르코가 고기를 썰어 나누어 주고, 질 좋은 포도주가 한 순배 돌았다. 성의 기사들이 백작이 가진 포도주에 대한 칭송의 말을 올렸다. 마르코가 한니발을 눈짓한다.
“나쁘지 않군.”
한니발의 기사 중 하나가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을 했으나 마르코는 화내지 않았다. 그는 한니발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만족하는 듯 보였다. 한니발이 공작새 고기를 한 입 맛보고는 이어 평했다.
“이건 질겨. 아쉬운걸.”
이번에는 한니발의 기사와 마르코의 서기관이 동시에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마르코가 짧고 서늘한 소리로 웃었으나, 그것은 결코 한니발의 혹평 때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포도주로 입을 씻게.”
둘의 말투는 산뜻하게 여겨질 정도로 점잖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서로에게 싸움을 거는 것처럼 여겨졌으리라. 그들은 더 이상의 대화 없이 식사를 이어나갔다.
마르코가 베푼 식사는, 한니발에게는 만족스럽지 못했을지언정 훌륭한 것이었다. 기사며 가솔들이 각자의 방으로 흩어지고 둘 또한 자리를 옮겼다.
한니발에게 주어진 방은 마르코의 방과 가까웠고 객에게 내어주기에는 과하게 여겨질 정도로 호화로웠다. 한니발의 종자가 포도주 병을 안고 그들의 뒤를 따랐다. 그는 노타리에스 백작령을 방문할 때마다 훌륭한 포도주와 귀한 향신료를 선물하곤 했다.
두 사람은 벽난로를 앞에 두고 비스듬이 앉은 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르코의 얼굴은 선이 얇은 구석이 있어 이국적으로 느껴졌고, 그것은 그의 어머니였던 노타리에스 부인으로부터 물려받은 요소였다. 한니발은 주홍색 빛을 받아 완전히 붉어진 눈으로 마르코의 이목구비를 뜯어본다.
마르코는 한니발의 낯에서 시선을 떼고 벽난로를 쏘아보았다. 그들은 서로를 잘 알았다. 즉, 마르코는 한니발이 자신을 통해 자신의 어머니를 보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눈이 시큰해질 때까지 날름대는 불길을 바라보았으나, 견디지 못하고 다시 한니발에게로 시선을 되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한니발이 줄곧 마르코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르코는 속이 뒤틀리는 감각을 느꼈다. 의식적으로 천천히 손을 들어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자, 한니발의 미소가 짙어졌다.
마르코가 충동적으로 내뱉는다.
“이 방은 어머니가 쓰시던 방이야.”
한니발은 동요하지 않았다. 마르코는 낭패감을 느낀다. 이것은 그가 숨겨 둔 한 수였다. 그는 한니발의 미소를 깨뜨리고 그를 당혹감으로 몰아넣기를 원했다. 그러나 한니발은 마르코의 속내를 전부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처럼 아무런 반응도 되돌려주지 않았다. 마르코는 다시 포도주를 마셨다. 벽난로의 열기 탓에 볼과 목덜미가 더웠다.
한니발 렉터라는 사내에 대한 미움과 원인을 알 수 없는 격정이 솟구쳤다.
이것은 어쩌면 자신에 대한 분노일지도 모른다. 마르코는 한니발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만두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계절이 바뀔 무렵 찾아와 정확히 이레를 머물고 돌아가는 한니발 렉터가 증오스러웠다.
마르코는 한니발이 전부 알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앎이 승리로 귀결되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마르코는 한니발을 잘 알고 있음에도 그를 이길 수 없었다.
마르코는 잔에 남은 포도주를 벽난로의 불 위로 끼얹었다. 불길은 포도주를 살라 먹고 연기를 뱉으며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황동 잔이 바닥에 떨어져 나뒹구는 소리. 마르코는 한니발에게 입을 맞춘다.
입술이 닿았을 뿐인, 짧고 건조한 입맞춤이었다. 한니발은 여전히 미소를 지을 뿐 아무런 말이 없다. 맞닿은 입술 사이에서는 포도주의 풍요롭고 향락적인 맛이 났으나, 마르코는 참담하게 일그러진 낯을 하고 있었다.
한니발이 왼손을 뻗어 마르코의 뺨을 감쌌다. 차가운 여섯 개의 손가락이 차례로 뺨을 감쌌다가 머잖아 떨어지는 감각. 그는 상체를 기울여 마르코의 입술에 짧은 입맞춤을 돌려주었다. 마르코가 이를 악물자 한니발의 손 아래로 그의 턱 근육이 도드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마르코는 한니발의 어깨에 손을 얹어 그를 느리게 밀어내었다. 씹어 내뱉는 말.
“한니발 렉터.”
“그래.”
“나는 자네를….”
“알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