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다리엘은 그의 소녀에게 위악을 떨기로 마음먹었다. 본능적이고도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루카는 필요하다면 얼마든 다정하게 굴 수 있는 남자였기에 그랬다. 그는 위선에도 근사한 거짓말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의 소녀에게 보내는 편지에 신사적인 말들이 수도 없이 쓰여 있었음은 물론이다.
눈앞에 얌전히 앉아 있는, 순진하기 짝 없는 여자를 달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루카의 혀는 매끄러운 은빛이다. 부드러운 말과 다정한 목소리를 꾸며낸다면 그의 소녀는 금세 웃어 줄 터였다. 루카는 그런 것들이 쉬웠다. 얼마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퍽도 실망한 모양이로군, 친애하는 아멜리아.”
루카는 그의 소녀에게 위악을 떨기로 마음먹는다. 스스로도 명확한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루카는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아멜리아는 말 속에 깃든 비꼬는 기색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아멜리아의 낯빛이 얼핏 굳어졌다. 정확히 루카의 의도대로였다. 루카는 아멜리아를 흔들고 싶었다. 그를 당황시키고 싶었다. 그의 온화하고 부드러운 표정을 전부 깨 버리고 격렬한 감정 속으로 몰아넣고 싶었다. 그러니 아멜리아가 표정을 굳힌 것은 기쁜 일이어야 했다.
그런데 전혀 기쁘지 않았다.
“이런, 상냥한 아멜리아. 정말로 실망한 거야? 이런 남자가 너의 후원자라서? 그래.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야.”
루카는 아멜리아를 알았다. 그들의 소통은 거의 대부분이 편지를 통해 이루어졌으나, 글은 때때로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해 주기 때문이었다. 아멜리아는 그의 ‘키다리 아저씨’에게 솔직했고 또한 충실했다. 루카는 아멜리아가 상냥한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그가 자신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루카가 ‘이런’ 남자라고 해서 실망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 불안함은 루카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분명했다.
“내가 미덥지 못한 사람이라는 거 다 알아. 하지만 아멜리아, 내가 너에게 보인 친절을 전부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 하하….”
아멜리아는 결코 읽어내기에 어려운 사람이 아니었다. 선한 인간은 으레 비둘기처럼 순결하며 양처럼 순수하지 않은가. 그러나 루카는 지금의 아멜리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졌다. 그의 맑고 침착한 얼굴 너머에 도사리고 있을 생각이 읽히지 않았다.
“아니면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을까? 이런 남자라서 말이야. 이미 봤잖아, 내 한심한 모습들을. 그런 면이 있는 남자라면 휘두르기 좋겠다고 여기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루카는 어둡게 웃었다. 고개를 비껴 부러 아멜리아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의 소녀가 이런 생각을 할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가 내뱉고 있는 말들이 아멜리아를 상처입힐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차라리 아멜리아가 정말로 그런 사람이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멜리아가 들쥐처럼 약삭빠르고 속된 인간이었다면 루카는 그에게 아무런 기대도 품지 않을 수 있었으리라. 그랬다면 두렵지도 불안하지도 않을 수 있었을 텐데.
이 순간, 아멜리아와 티 테이블을 가운데에 놓고 마주 앉아 고개를 돌리고 있는 지금에서야, 루카는 자신의 이 불안이 어디서부터 기인했는지를 깨닫는다. 그는 아멜리아가 자신을 거절하게 되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이토록 한심스러운 남자가 자신의 후원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아멜리아가 떠나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공포감이 그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루카는 그의 소녀가 그를 밀어내는 것이 두려웠다. 편지지 속에서 정갈한 글씨체로 그에게 날씨와 삶과 꿈에 대해 이야기하던 소녀를 더는 만날 수 없을까 무서웠다.
고개를 돌려 아멜리아와 눈을 마주하면, 소녀는 여전히 맑고 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데.
“… 분명 넌 내게 실망했겠지, 아멜리아.”
형편없었다. 그보다 다섯 살은 어린 여자를 앞에 앉혀 두고 온갖 말을 늘어놓다가 혼자 풀이 죽은 모습이라니, 최악이다. 그러나 아멜리아의 눈은 루카의 영혼 가장 밑바닥을 꿰뚫어보는 것만 같았다. 외면과 도피로 엮어 왔던 삶의 궤적을 전부 읽어내는 것 같아 부끄러워졌다.
“아니요, 루카 씨.”
그러나 아멜리아의 목소리는 평온하고 담담하다. 편지지에 쓰인 글씨와 꼭 같았다. 아멜리아는 미소짓고 있었다.
“제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리라는 것, 다 알고 계시잖아요.”
루카는 묻고 싶어졌다. 너는 어떻게 나를 보며 웃을 수 있지? 나는 너를 상처입히고 싶어 애쓰다가 정작 나까지 상처입고 말았는데, 너는 어째서 담담하지? 어떻게 그렇게 강할 수 있는 거지?
어째서 나를 이해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거지.
“다시 편지할게요, 루카 씨.”
그 환한 눈. 오월의 나무처럼 강하고 선한 그 눈.
“답장, 해 주실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