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멸이 내민 손
딱복2025-05-06 23:24

연백룡은 패배했다. 분노도, 증오도, 주박이 되어 그를 옭아매고 있는 복수심마저도 승리의 담보가 되어 주지는 못했다. 연옥염이라는 여자는 치가 떨리도록 강했다. 아무리 팔을 뻗어 본들 백룡의 칼날은 그에게 닿을 수 없었다. 상처가 쓰라렸으나 그깟 것은 중요치 않다. 백룡은 찬 바닥에 엎드린 채 이를 갈았다.

전신의 피가 끓어오르는 듯한 감각. 견딜 수 없었다. 그에게는 해야만 하는 일이, 죽여야만 하는 자가 있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너무나 무력했다. 통증과 괴로움, 끓어오르는 증오가 살가죽을 찢고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그때 다가오는 발소리가 있다. 백룡은 고개를 들었다. 사박사박 소리를 내며 흙먼지를 밟는 고운 맨발. 쥬다르였다. 그가 손을 내밀며 말하기를.

“네가 만약 운명을 원망한다면… 내가 그 팔을 잡아주마.”

그에게는 힘이 필요했다. 복수할 힘이. 연옥염을 죽일 힘이. 이 마귀의 나라를 옳게 되돌릴 힘이.

연백룡은 망설이지 않았다.

루프가 우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어느 밤. 바람 한 점 없이 공기만 서늘한 가운데, 백룡은 손수 대황촉을 밝혀 놓고 창가에 앉았다. 촛불이 간간이 흔들려 백룡의 그림자를 이지러뜨릴 뿐 고요했다. 그는 하릴없이 침잠한다. 이처럼 침묵 가운데 홀로 있는 순간이면 어김없이 과거의 망령이 그를 휘감아 가라앉혔다.

초의 심지가 타들어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한데도 백룡의 머릿속에서는 궁의 대들보가 불타 무너지는 소리가 선명했다. 불길이 벽과 천장마저도 살라 먹는 공포스러운 소음. 화마를 견디지 못하고 뒤틀리는 목재들의 비명. 죽어가는 자들의 신음. 그토록 준수하고 근사하던 형님은 살껍질이 전부 벗겨진 채로 스스로의 가슴을 갈라 백룡에게 피를 퍼부었더랬다.

좌반신이 뜨거웠다. 나은 지 오래인 상처인데도, 이상하게도….

백룡은 심지를 집어 촛불을 끈다. 순식간에 사위가 새까만 어둠으로 물들었다. 심지로부터 피어오른 연기가 달빛을 받아 어렴풋한 은백색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시야가 어둠에 적응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검푸른 하늘을, 그리고 그 아래로 펼쳐진 황 제국의 땅을 바라보았다.

제국의 궁전이란 과연 그 위엄에 어울리는 규모를 갖추고 있는지라, 높지 않은 전각의 창에서 바라보이는 경치 전체가 궁의 내부였다. 조경을 위해 심어 놓은 나무들은 흰 달빛 아래서 파도처럼 보였다. 오늘은 어쩐 일로 바람이 없는 밤인지라 나무들은 그저 서 있을 뿐 춤추지 않았다. 꺼진 초의 연기가 창 밖으로 빠져나가 사라진다.

그는 달그림자가 진 황제궁을 쏘아보았다. 밤의 평온한 정경을 눈앞에 두고 앉은 이라고는 믿기지 않을만큼 격정적인 증오에 찬 얼굴을 하고. 궁궐의 부지 정 가운데에 가장 웅장한 규모로 지어진 황제궁은 어둠 속에서 도도한 황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저 안에 그 여자가 있을 것이다. 황제궁 가장 심처에, 무명의 짐승처럼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그를 죽여야 한다. 나는 그러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백룡은 이미 정도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그러나 정도라는 것은 대체 누가 정한 것인가? 옳은 길을 걸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이란 말인가? 정의를 행해 봤자 죽은 자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떠나간 이들은 영영 떠나간 것이다. 백룡이 해야 할 일은 애도가 아닌 복수였다.

문득 밤새가 우는 듯 애처로운 삐이이 소리가 들렸다.

백룡은 각오를 다지기 위해 뇌까린다.

“나는 이미 쥬다르의 손을 잡았다. 복수를 위해서라면, 더한 짓도 할 수 있어.”

“그렇다면….”

젊은 여자의 목소리. 백룡은 소스라쳐 뒤를 돌아본다. 

“그 팔. 나도 잡아줄까?”

그 여자는 달빛이 닿지 않는 실내의 깊은 그림자 속에서 미끄러져 나왔다. 마치 어둠이 잉태해 낳은 비정형의 생물처럼. 깊은 물 속에서 기어 올라와 마침내 만개하는 수련처럼.

“…뭡니까? 당신은….”

여자는 나직한 소리로 웃었다.

“그게 중요할까?”

백룡은 경계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몸을 낮추었다. 여자는 그것을 퍽 즐거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중요한 건 그게 아냐. 정말로 중요한 건, 백룡. 너의 목적에 가 닿는 길에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거지.”

“내 이름은 어떻게 알고 있는 겁니까?”

“하하…. 본질을 봐, 백룡. 내가 방금 말했잖아. 나는 너의 목적에 도움이 될 수 있어. 네 귀여운 패륜 행각을 거들어 줄 수 있다고.”

그는 백룡의 이름과 그 목적을 애초부터 아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러나 백룡의 의식을 잡아끈 것은 그 여자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 따위가 아니었다. 복수에 눈먼 자는 마주 서 있는 미지와 말을 섞는 우를 범하고야 만다.

“돕는다면. …어떻게?”

여자는 초승달처럼 웃었다. 그가 백룡에게로 더 다가와 이윽고 달빛 아래에 서자, 백룡은 그의 머리칼이 새벽하늘처럼 창백한 푸른빛임을 알 수 있었다. 금붙이로 치장했음에도 파리한 수련처럼 보이는 여자. 흰 옷을 입었음에도 해 질 무렵의 어스름처럼 보이는 여자….

“내 이름은 계천.”

결코 질문에 올바른 대답을 돌려주지 않는 여자.

계천은 백룡에게 손을 내밀었다. 희고 고우나 산 자의 것 같지 않은 손. 백룡은 그의 손을 바라볼 뿐이었으나 계천은 그 따위는 상관없다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는 춤을 추듯 혹은 연못 속 잉어의 지느러미가 물 속을 유영하듯 걸었다. 계천은 백룡의 주변을 한 바퀴 돌며 말했다.

“네 어미가 무엇이고 무엇을 위해 행동하는지를 알아. 네가 그 여자의 목을 치는 순간까지 너를 도울게. 약속해. 난 분명 도움이 될걸….”

“그렇다면, 당신이 얻는 건 무엇이죠?”

“글쎄. 비밀로 해 둘까. 후후…. 하지만 백룡. 난 충분히 강하고 많은 것을 알지.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백룡은 바보가 아니었다. 계천이라 자신을 소개한 이 미지의 인물이 위험하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복수를 향한 비이성적인 열망이 눈을 가린 탓일까.

“…좋습니다.”

백룡은 파멸의 손을 잡는다. 계천은 꽃이 피어나듯 환히 웃었다. 어두운 하늘 아래 어렴풋한 달빛만이 창백한데, 다시금 멀리서 들려오는 새 우는 소리. 그것의 깃은 분명 검으리라.

그러나 연백룡에게는 상관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