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는 어둠 속에서 눈을 뜬다. 때도 장소도 불명확한 무명의 어둠*. 자신이 정말로 눈을 뜬 것인지, 그것이 아니면 그저 존재를 자각한 것인지조차도 확신할 수 없었다. 손을 내려다보자고 마음을 먹고 고개를 숙이니 -이 또한 확신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흰 손이 보였다. 존재는 그제서야 자신이 눈을 떴음을, 실재함을 알았다. 그는 어둠 속을 유영한다.
앎은 사고를 불러온다. 그것은 연속적이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찬찬히 되짚어 보았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은 괴로울 정도의 탈력감과 고통이었다. 아, 그래. 그곳은 나를 지독하게도 소모시키려 들었지. 그는 구누도에 대하여 생각한다. 도구로서 기능하던 시간들을, 그리고 예고도 없이 눈 앞을 가르던 빛을. 자유를.
기억들은 짧은 심상에 가까울 정도로 단편적이다. 그는 단번에 전장에 내던져진다. 끓어오르는 듯한 소음들은 귀를 기울여 듣노라면 전부 고함과 비명이었다. 산 것들은 너무나 덧없이 죽었다. 그에게는 그것이 쉬웠다. 부수고 짓밟는 것들이 쉽고도 재미있어 견딜 수 없었다. 그의 영혼은 파괴에 매료되었다. 전쟁을! 더 많은 전쟁을!
그의 영혼은 본질적으로 불꽃이었다. 깊고 차가운 물이었다. 살라 먹고 재로 만들어야만 했다. 가라앉혀 죽여야만 했다. 그는 영속하는 싸움을 원했다. 세상을 폐허로 만들고 싶었다. 그는 자신이 웃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둠 속에서 그는 사지를 편다. 밤목련처럼 만개한다.
계천은 세상으로 되돌아온다.
계천은 세상을 떠돌며 솔로몬의 작품을 감상했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감탄스러웠다. 그는 이 세상이 마음에 들었다. 불완전하며 혼란스러운 점이 특히 그랬다. 이 세상을 유리구슬처럼 손 위에 올려놓고 짓이길 날이 기대되었다. 그는 세상의 내로라하는 강자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계천은 힘과 권력에 민감한 자였다. 세상을 뒤흔들기에 적합한 인간과 방법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는 마기들을 발견했다. 계천은 그들을 바라보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누구에게도 손을 뻗지는 않았다. 계천은 아직 약했다. 오랜 봉인 끝에 세상에 내던져진 탓으로, 힘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것이다. 또한 힘을 회복할 수 있다면 마기들에게 볼일은 없다. 계천의 세계는 아주 단순하고 명료한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는 싸우지 못하게 된 까닭으로 마기를 싫어했다. 그러나 이제는 마음껏 싸울 수 있다. 그러니 마기를 싫어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계천은 또한 몇몇 걸출한 인물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왕의 재목이라 해도 무리가 없는 이들이었다. 마기는 그들 중 몇을 골라 왕으로 삼았다. 계천은 입술을 비죽거린다. 이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알았다. 계천은 마기가 아니었으나, 재미 삼아 그들을 견주어 보기도 했다. 누구 하나 마음에 차는 이가 없어 금세 그만두었다.
또한, 계천은 아르바를 발견했다. 다른 몸을 입고 있었으나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흥미로 눈을 빛내었다. 아르바라면 그를 즐겁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새로운 분쟁을, 새로운 전장을 내어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계천은 곧 흥미를 잃고 말았다. 아르바의 눈은 지나치게 거대하고 무용한 것에 닿아 있었다. 계천은 신도, 섭리도, 세상을 흘러가게 하는 위대한 의지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것들은 계천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다. 지나치게 멀었다. 그는 당장 움켜쥐어 부술 수 있는 것을 원했다. 이 세상을 뒤흔들고 싶었다.
계천은 아르바의 주위에 있는 왕의 재목들에게로 눈을 돌렸다. 무기를 고르듯 그들을 골랐다. 그들은 고만고만하게 걸출했고 또한 고만고만하게 불행했다. 계천은 불행이 사람을 어떤 방식으로 정제하는가를 보고 익혀 알았으나 그들은 비슷한 고통과 증오를 품고 있었다.
결국 계천이 고른 이는 연백룡이었다. 그가 어리고 미숙하며 열정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분노는 제어할 수 없는 편이 좋다. 미움은 격정적일수록 좋다. 분노와 미움은 불과 닮아 있기에 그랬다. 불은 그것을 놓은 자마저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야 했다.
계천은 때를 노렸다. 젊은 청년의 가슴 속에서 피어오른 고통이 가장 농익을 때를. 그의 내면에 고인 독이 깊어져 못을 이룰 순간을 기다렸다. 본디 계천은 기다림을 좋아하지 않는 성품이었으나, 이번의 기다림만큼은 제법 즐거웠다. 이 인내가 영글어 마침내 수확하게 될 때를 생각하니 유쾌해졌다. 그는 자신이 뿌린 불씨가 지평선을 불태우는 장면을 상상한다.
그리고 연백룡은 무너진다. 그는 아르바에게 처참히 패배하고 흙먼지와 함께 울분을 씹어 삼켰다. 검은 마기가 내민 손을 잡았다. 계천은 마침내 때가 왔음을 알았다.
어두운 밤이었다. 계천은 드리운 그림자 속에 숨어 연백룡을 바라보고 있었다. 젊은 청년은 창가에 촛불을 벗 삼아 앉아 있는데, 퍽 외로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유달리 바람이 없어 촛불이 피워올리는 연기가 길게 이어지는 모습이 선명하였다. 계천은 어둠 속에 도사린 채로 청년이 자신의 불행과 괴로움에 휘감겨 침몰하는 것을 관망한다. 허리를 세우고 앉은 뒷모습은 단정하였으나 그의 어깨에는 공허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계천은 내심으로 고개를 갸웃한다. 그는 맹렬한 증오를 몰랐기에 그것이 불러오는 탈력감 또한 몰랐다. 계천은 증오하기에 부수려 드는 이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파괴가 즐겁기에 파괴하는 자였다. 연백룡은 손을 뻗어 촛불을 끈다. 어둠의 영역이 확장되었다. 창틀을 거쳐 쏟아지는 달빛의 창백한 은빛을 제외하면 사위가 전부 검었다.
연백룡의 목소리.
“나는 이미 쥬다르의 손을 잡았다. 복수를 위해서라면, 더한 짓도 할 수 있어.”
계천은 피어나듯 웃었다. 즐거워 견딜 수 없었다. 청년의 증오는 영글어 굳어지고, 손을 뻗어 열매를 딸 때가 온 것이다.
“그렇다면….”
계천은 무명의 어둠을 헤치고 나아간다. 연백룡이 소스라쳐 뒤를 돌아보자 그의 얼굴 또한 달빛을 등져 어둠에 먹혔다. 무명의 어둠. 계천은 그것이 불러올 파멸을 점쳐본다. 이 불완전한 세상은 불타야만 한다.
“그 팔. 나도 잡아줄까?”
*김춘수 시인의 <꽃을 위한 서시>에서 차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