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휘에게 있어 확신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은 기하학적인 형태의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석벽이었기에 그랬다. 생각이 쉼 없이 가지를 쳐 불어나는 곳. 덩굴로 이루어진 프랙탈 구조. 그것은 반복적이고 강박적이다. 간절하다. 그는 살기 위해 사유해야 했다. 멈출 수 없었다.
그러나 어떠한 사건은 사고의 사슬을 끊으며 온다.
“나, 당신을 사랑해.”
블라디미르 룸펜은 애걸하듯 말했다. 드문 일이었다. 그는 애걸하는 부류의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오 년 전의 블라디미르는 수줍어할지언정 애원하지 않았다. 근래의 블라디미르에 대해서라면 말해 무엇할까. 어딘가 묘한 구석이 있는 무성 영화의 배우처럼 구는 그 남자에게 애원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니 이것은 이상한 일이다. 이휘는 생각한다. 사람의 눈물이 가리키는 수많은 감정의 지표들을, 그 감정이 촉발시킬 행동들을. 끊임없이 생장하는 덩굴들. 이휘의 머릿속은 금세 엉망이 된다. 그러나.
“당신을 사랑해….”
찰칵. 담쟁이덩굴의 줄기를 자르는 정원 가위 소리. 사고가 멈추었다. 이휘는 우두커니 선 채 블라디미르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거실과 부엌이 이어지는 공간에 있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끝낸 참이었다. 블라디미르의 고백은 갑작스러웠다. 일상의 영역에 끼어든 뜨거운 비일상이었다. 블라디미르는 스스로의 말에 놀란 사람처럼 얼굴을 붉히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생각의 확장이 끊긴 이휘가 멍청하게 질문했다.
“블라디의 사랑은 어떤 것이죠?
블라디미르가 젖은 눈을 깜빡였다. 이휘는 차분하게 첨언한다.
“나는 지금까지 블라디 당신과 나눈 모든 것을 친애로 인식하였소.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몸을 섞는 것 모두를. 그런데 당신에게는 아니었던 모양이군.”
이휘는 블라디미르가 어쩔 수 없이 상처받은 낯을 하는 것을 바라본다. 그는 블라디미르가 자신을 알고 있음을 알았다. 이휘는 이런 방식의 인간이었다. 이성과 논리로 모든 것을 재단하는 사람이었다. 갑작스럽게 내밀어진 이 사랑이라는 것에 접근하는 이휘의 태도가 블라디미르를 아프게 한다는 것이 오히려 의외였다. 이것이 사랑의 속성인 것일까?
“어째서 나를 사랑합니까? 다른 사람들과 내가 어떻게 다르기에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한 건가요?”
블라디미르는 휘청대며 두 걸음을 뒷걸음질쳤다. 다리가 풀려 볼썽사납게 주저앉을 뻔 한 것을 간신히 바로 섰다. 그는 큼직한 손으로 엉망이 된 낯을 덮으며 숨을 골랐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그랬다. 블라디미르는 이휘를 알았다. 그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이 어떠한지를 또 그가 그에게 주어진 것들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잘 알았다. 이휘는 정말로, 그저 알고 싶을 뿐인 것이다. 블라디미르가 그에게 내민 사랑을 이해해 보려 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가슴의 통증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모르겠어. 알 수 없어. 확실한 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 뿐이야. 사랑은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잖아. 이유를 붙일 수 없잖아.”
이휘는 입술을 다물고 블라디미르를 응시한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 이것만이 분명한 사실이야. 이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어.”
물막이 덮인 블라디미르의 눈은 어스름이 깔릴 무렵의 연못 같았다. 서늘한 바람에 수면이 일렁이는 것이 선명했다. 이 순간의 블라디미르는 어느 때보다도 솔직하고 무력해 보였다. 평소 무장처럼 두르고 다니던 연극적인 태도도, 매끄러운 웃음도 모두 잃은 채 사랑을 말하고 있었다. 이휘에게 패배했노라고 고백하고 있었다. 이휘는 그 녹색 눈 속에 비친 자신을 본다. 피로가 깔린 무표정한 낯을. 불가해를 앞에 두고 의아한 기색을 띤 눈을.
그는 문득 미안함을 느낀다.
블라디미르에게 당장 무언가를 돌려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가슴 속에 감정이 가득 차 있어서, 긍정이든 부정이든간에 선뜻 내놓을 수 있었더라면. 그렇다면 블라디미르를 슬프게 하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이휘가 할 수 있는 말은 이뿐이었다.
“내게 시간을 줘요.”
블라디미르는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이휘는 이른 오후의 적막한 거리를 걷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출근했을 시간인지라 마을은 일상적인 고요함에 잠겨 있었다. 먼 곳에서 자동차가 지나가는 소음이 간간이 들릴 뿐이었다. 이휘는 목적지 없이 떠돌았다. 이것은, 말하자면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산책이었다.
블라디미르가 사랑을 고백한 어젯밤. 이휘는 오래 잠을 설쳐야만 했다. 그러나 아침에는 이상하게 눈이 일찍 뜨였다. 입맛이 없었다. 찰칵. 정원 가위 소리. 이상한 일들 투성이었다.
사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산책’이라는 말은 이휘에게 있어서는 어색한 것이었다. 그는 생존을 위해 치열한 사고를 지속하는 인간이었기에 그랬다. 헤엄치기를 멈추면 질식하는 상어나 죽는 그 순간까지 생장을 계속하는 담쟁이덩굴처럼, 그는 사유해야만 한다. 생각을 멈추는 순간 무엇이 닥쳐올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이휘는 어렴풋한 예감으로 그것을 피하고자 애썼다.
문득 발이 멎었다. 시선이 닿는 곳은 빨간 벽돌로 담을 둘러친 이 층짜리 주택이었다. 그 벽돌담은 숨막히도록 빽빽한 담쟁이에 감싸여 있었는데, 무성한 잎사귀와 덩굴은 아름답다기보다는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무거운 초록 사이로 간신히 얼굴을 내민 벽돌을 바라보며 이휘는 무엇을 생각했던가. 프렉탈 구조. 영원히 반복되는 나선. 끊임없는 생장. 사고는 스스로 확장한다. 멈추지 않는다. 멈출 수 없다.
나, 당신을 사랑해.
찰칵. 정원 가위가 덩굴을 잘라내는 소리.
이휘는 블라디미르의 고백을 떠올린다. 부러 떠올리고자 했던 것도 아닌데, 그것은 자연히 있어야 할 곳에 있듯 이휘의 머릿속에 자리잡았다. 생각이 멈추었다. 서로 뒤엉키며 새끼를 치던 그것들이 일시에 정지해 이내 사라진다. 당신을 사랑해, 하는 한 마디만이 머릿속 가득히 울리고 있었다.
아주 생경한 감각이었다.
낯설었으나 두렵지 않았다. 먼지처럼 흩날리던 파편적인 사고들이 가라앉고, 유일하게 선명한 것은 그의 목소리 뿐이었다. 애원하듯 부드러웠던 그 목소리. 젖은 시선. 세상에 오직 자신과 그만이 있다고 웅변하듯 이휘를 바라보던.
문득 그가 그리워졌다. 뛰어 돌아가면 십 분밖에 걸리지 않을 곳에 그가 있는데도. 이휘는 그리 생각한 스스로에게 놀라고 만다. 손끝으로 볼을 문질러 보니 살갗이 뜨거웠다.
이것은 무엇이지? 이토록 부드러우나 명료한 것은. 낯설지만 확실한 이것은. 정원 가위가 공포스럽게 증식하는 덩굴을 잘라내듯 이휘의 숨막히는 사고를 잘라내는 이것은.
이휘는 이런 것을 몰랐다. 그는 담쟁이덩굴에 감싸인 채 질식해가는 석벽이었다. 녹색은 탐욕스럽고 치밀해 이휘는 햇빛도 바람도 모른 채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찰칵. 또다시 정원 가위 소리. 그것은 저편에서부터 들려온다. 이휘를 둘러싼 사고의 줄기를 잘라내며 온다. 저만치 들이치는 햇빛과 새삼스럽도록 달콤한 바람의 향기.
이것에 이름을 붙이자면 사랑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휘는 손끝으로 담쟁이 잎사귀를 걷어내 보았다. 햇살에 익어 따스한 벽돌이 손 끝에 닿았다. 낯선 감촉. 그러나 온기가 느껴진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는 몸을 돌린다.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간다. 집으로 갈 것이다. 블라디미르 룸펜에게 할 말이 있었다.
찰칵. 정원 가위 소리. 이휘는 햇빛 아래로 걸어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