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중물
딱복2025-04-25 00:25

열린 창으로부터 짠기 섞인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화사한 한낮. 창은 바다를 향해 나 있다. 짙푸른 수면과 그 위로 부서지는 윤슬이 흰 물감으로 그린 듯 선명했다. 나이트는 등나무를 엮고 푹신한 방석을 얹은 의자에 기대앉아 그 풍경을 바라본다. 라피스는 항구도시기에 대부분의 해변이 시끄럽고 활기찼으나, 이 창을 통해 보는 바다는 늘상 고즈넉한 침묵 속에서 반짝일 뿐이었다. 디야브가 나이트에게 고요한 평온을 선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집을 구하기 위해 제법 정성을 들였었다.

철썩, 철썩… 하는 파도 소리와 먼 곳으로부터 아스라이 들려오는 사람들의 소음. 그의 삶에 이토록 안정으로 가득했던 순간이 또 있었던가. 나이트는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고 만다.

이 세상이 다른 세상을 모방했을 뿐인 모형 세계라는 것이 때로는 믿기지 않았다. 이 세계에도 인간은 존재하고 저들의 삶을 살아가는데, 눈 앞에서 파도치는 바다는 저토록이나 푸르고 선명한데….

되돌아보면 이상스러운 일 뿐이다. 그는 태어나 살아왔으나 그 삶이란 것은 거짓 눈속임이었다는 점이 그랬다. 또한 세계를 부수고 뒤섞는 수준의 악의가 있었고, 그들은 싸웠으며, 마침내 이겼다는 점도 그렇다. 그 뒤에 찾아온 것이 절망적인 공허와 지독한 피로감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이상한 일이다. 온 몸을 늘어뜨린 채 등나무 의자에 앉아 있는데도, 짓눌리는 듯한 피로가 느껴졌다. 나이트는 지친 한숨을 내쉰다. 고개를 젖히니 바닷바람이 머리칼을 쓸고 지나는 것이 느껴졌다.

나이트는 자연스럽게 디야브를 연상한다. 그는 나이트의 머리카락을 꼭 이런 방식으로 어루만졌다. 그 손길에 이름을 붙이자면 애정이 될 것이나, 나이트는 그 또한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고야 만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너무도 소중한 것을 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완전히 비어 있던 한 인간의 내면을 채우는 데에는 얼마만큼의 정성이 필요할까? 나이트는 디야브의 텅 빈 우물 같던 가슴을 슬픔과 애통함으로 가득 채우는 데에 성공했으나, 그 답을 알 수는 없었다. 그 또한 비어 있는 인간이기에 그랬다. 나이트와 디야브라는 두 존재는 어떠한 면에서 서로 기댄 듯 닮아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빈 곳을 맞물리고 상처를 핥으며 지난 몇 년을 살았다. 그들은 서로를 연인이라고 부르기로 정했다.

그러나, 애초에 자신과 같이 지친 자가 누군가의 공허를 채워주겠노라고 자신한 것이 어리석은 짓일런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때의 나이트는 오만에 눈멀었던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니 이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나이트는 눈을 감은 채 짧게 웃는다. 오후의 햇살이 눈꺼풀 안으로 붉고 따스한 빛을 비추었다.

빛과 온기는 디야브를 닮아 있다. 태양이 빛으로 세상을 살게 하듯, 그는 나이트에게 무엇인가를 내주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처럼 굴었다. 디야브는 그를 돌보고, 일상을 베풀었으며 또한 나이트를 삶에 붙잡아두었다. 마침내 나이트가 지치고 지쳐 죽음으로 도피하려 할 때에, 슬퍼하면서도 마침내 그를 놓아주려 했다. 그것은 얼마만큼의 애정일까?

마음의 무게를 저울에 달아 꼬리표를 붙일 수 있다면 나이트가 가진 마음은 아주 가벼워 먼지와도 같으리라. 그는 본래의 세계에서 살아남던 그 무렵에 이미 부서져 있었기에 그러했다. 그러나 디야브의 마음은, 자신과는 다르다.

나이트는 디야브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모를 수 없었다. 대체 어떤 사람이 타인을 삶에 붙잡아두기 위해 바늘을 삼키고, 그의 유일한 행복을 위해 죽음으로 떠나보낼 결심을 하겠는가. 마지막 순간 나이트가 자신을 잡아 달라 매달리지 않았더라면 디야브는 나이트의 마지막 순간을 가만히 지켜보았으리라.

그러니 모든 문제의 원인은 나이트에게 있다. 감았던 눈을 뜨니 여전히 바다는 부서진 보석의 파편처럼 찬란한데, 나이트는 실낱 같은 한숨을 내쉴 뿐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나이트는 세계를 구했다. 살아남았으며 머물 곳을 가졌다. 자신을 너무도 사랑하여 삶도 죽음도 쥐여주려는 연인이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내던지고 도망치고 싶어지는 것은 어째서일까. 죽음 외에는 바라는 것이 없다며 발버둥쳤으나 정작 디야브가 자신을 놓아주니 두려워졌던 것은, 어째서일까.

알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해는 하늘 중간에 있어 노을이 지려면 한 뼘도 넘게 남았다. 나이트에게는 생각할 시간이 충분했다. 그는 계속해서 숙고한다. 죽음에 대한 갈망과 끝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양가적인 감정은 그의 피로를 더욱 깊게 만들고 있었다. 꼬리를 물고 맴돌던 생각은 결국 디야브에게서 맺어진다. 당연한 일이었다. 디야브는 나이트의 유일한 부표이자 닻이었고 일상의 중심이었기에. 

그러나 디야브의 헌신과 사랑은 아직도 미지의 영역이었다. 나이트는 자신조차도 사랑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 디야브가 배우고 배워 이윽고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 여전히 어려웠다. 디야브가 가면을 벗듯 가장을 그만두고 자신의 무채색인 면모를 내보였을 때, 나이트는 그가 마른 우물과도 같다고 느꼈었다. 그러나 지금의 디야브는 꼭 저 바다처럼 다정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었다. 나이트가 제자리걸음을 하는 동안 디야브는 그토록이나 강해진 것이다. 약간의 씁쓸함이 느껴졌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이트는 다시 한 번 해를 확인한다. 아직 이른 오후쯤인데 벌써 디야브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디야브?”

“응, 나 왔어.”

“어쩐 일이에요? 이렇게 일찍 오고.”

디야브는 조금 망설인 끝에 대답한다.

“그냥, 보고 싶어서.”

나이트는 그제야 디야브가 조금 수줍어하고 있음을 눈치챈다. 그러나 그에게 입을 맞추거나 끌어안을 마음이 들지 않아 고개를 끄덕인다.

“뭐 하고 있었어?”

“그냥… 바다 보고 있었어요.”

둘은 등나무 의자를 나란히 놓고 앉는다. 두 사람이 가만히 바다를 바라보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문득 나이트가 입을 연다.

“어때요?”

“뭐가?”

“나로 인해 슬픔이나 기쁨을 느끼게 된 것….”

아무런 예고도 없이 꺼내기에는 지나치게 무거운 주제였으나, 디야브는 침착하다. 그는 언제나 대답을 준비하고 있던 사람 같다.

“나는 감정이 궁금했으니까, 좋아. 만족스러워. 그리고 내게 이런 모든 것을 알려준 사람이 당신이라서….”

고개를 돌리면 시선이 닿는다.

“그게 가장 기뻐.”

아직 해가 지려면 멀었는데도 디야브의 눈 속에는 석양이 있다. 땅거미 지는 보랏빛에서 시작해 불타는 주홍으로 이어지는 빛. 언젠가부터 디야브의 눈은 다채롭게 반짝이기 시작해, 나이트는 그것이 경이롭다고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당신은… 아직도 지쳐 있지.”

디야브는 다시 먼 수평선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건 슬퍼.”

“…디야브.”

“새벽을 주는 사람이 되겠노라고, 누구에게도 주지 않은 마음을 주겠노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오후의 햇살은 찬란하고 바닷바람은 달콤하게 불어오건만. 어째서 이토록 마음은 괴로운 것일까?

“아직 당신에게는 새벽이 오지도 않았고 내 마음이 닿지도 않은 것 같아서.”

나이트는 대답도 않은 채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바다를 바라본다.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그가 건넨 마음을 기뻐하며 온전히 받을 수 있는 사람이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로 인해 삶의 암운이 기적처럼 걷히고 순식간에 새벽이 찾아왔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나 어려웠다.

그러니 신기한 일이다. 자신과 같이 메마른 자로 인하여 디야브가 저토록이나 아름다운 빛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은.

나이트는 망설임을 거두고 물었다.

“왜 나예요?”

디야브는 등받이에 몸을 깊이 기대었다.

“…그러게. 어째서 당신일까? 왜 하필 당신일까.”

이유도 없이 조바심이 나서, 나이트는 다시 디야브를 바라본다. 마법처럼 시선이 맞았다. 한참 전부터 디야브는 나이트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당신이여서 좋아. 당신이 아니면 이제는 안 될 것 같아. 이런 건 대답이 되기 부족할까?”

까닭을 모르더라도 사랑은 성립하는 것일까. 아니면 사랑이란 본디 까닭 없이 시작되어 이루어지는 것일까. 나이트는 사랑을 몰라 알 수 없다.

“있지, 나이트. 마중물이 뭔지 알아?”

디야브는 어린아이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주듯 말을 찬찬히 꺼내놓는다.

“사마드의 마른 땅에 설치된 수도 펌프는 그냥 물을 길으려고 하면 물이 나오지 않아. 내가 가진 물을 조금이라도 부어 줘야 비로소 땅 밑의 물이 길어져 올라오는거야.”

마주한 디야브의 눈 속에서 별이 반짝이고 바람이 불어온다.

“당신이 내게 그랬어.”

“…….”

“당신이 알려준 온기가 내게 사랑을 알게 했어.”

부드러운 목소리. 디야브는 가만히 나이트의 손을 잡았다. 그는 밀어내지 않는다.

“그러니 이제는 당신에게 주고 싶은 거야. 이유를 찾아야 한다면 당신이 당신이라는 것. 그것뿐이네.”

그 순간 나이트의 눈가가 뜨거워진 이유는 무엇일까. 코가 시큰하며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른 이유는?

나이트가 이유를 찾아야 한다면, 그것은 분명 디야브가 되리라.

그가 디야브에게 가르친 것들이 마른 우물과도 같았던 디야브에게서 사랑을 길어내었다면, 이제는 디야브가 그의 이유가 되어 나이트로부터 삶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삶은 여전히 무겁고 그는 변함없이 지쳐 있다고 해도, 디야브에게 기대어 함께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조금씩이라도 함께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디야브와 함께라면, 그의 손을 잡고 선다면….

“그렇다면 디야브. 내게도 가르쳐 줄 수 있어요?”

젖은 뺨을 하고도 나이트는 활짝 웃었다. 아주 오래간만의 웃음이었으나 어색하지 않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 꽃이 피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디야브는 망설임이라고는 없이, 곧바로 대답한다.

“물론이지.”

사랑이란 어디로부터 시작해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무엇으로부터 기인해 어떤 방식으로 깃드는 것일까? 누구도 알지 못하나 누구라도 알 수 있으리라.

나이트 또한 이제는 알게 될 것이다. 디야브가 그의 곁에 마중물로 있을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