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올 멸망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손놓아 지켜보는 자의 심정은 어떠할 것인가? 누군가가 이 질문의 답을 원한다면 루나에게 묻는 것이 가장 정확하리라. 오를레앙 공작의 개인 수행원인 루나라는 여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어떤 방식으로 몰락하게 될지를 전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루나는 오를레앙 공작의 패망을 손으로 그려낼 듯 잘 알면서도 아무런 개입도 언질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오를레앙 공작의 무너짐마저도 사랑했다. 그에게 다가올 처참한 패배의 순간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이 축복으로 여겨질 정도로,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첫눈에 반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명확한 사랑의 신호가 아닐까. 루나는 그런 사랑을 무대 위에서 만났다. 객석은 어둡고 조명은 무대 위를 비춘다. 오를레앙 공작은 불길하고 우아한 까마귀처럼 빛나고 있었다. 루나는 그 순간 운명의 종소리를 들었다.
그러니 이런 판타지와 같은 상황은 얼마나 행운인가!
뮤지컬을 열심히 보았더니 뮤지컬 세계 속으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적어 놓으니 이상한 이 문장은 적어도 루나에게는 현실이었다. 그는 정신을 차려 보니 불어로 대화를 하고 있었고 또 정신을 차려 보니 사랑해 마지않는 그 오를레앙 공작의 측근이 되어 있었다. 행운의 여신과 사랑의 여신이 그에게 미소를 짓는다. 공작이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는 것은 언감생심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곁에 있을 수 있음이 행복했다. 다가올 대혁명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루나는 부나방처럼 사랑에 몸을 던졌다.
그래서 생일선물은 무엇을 줘야 할까?
최근 루나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가장 큰 고민은 바로 이것이었다. ‘현실’에서 살아갈 때에야 오를레앙 공작의 생일날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커다란 모니터의 그의 사진을 띄워 놓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며 케이크를 먹으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루나의 현실은 대혁명기 직전의 프랑스로 바뀌었고, 사랑해 마지않는 오를레앙 공작은 무대 위도 모니터 속도 아닌 루나의 눈앞에 있다. 이 세계에서 맞는 그의 첫 생일이었다. 무엇이든 가장 귀하고 좋은 것을 그에게 주고 싶었다.
루나는 마차 창문을 쏘아보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오를레앙 공작이 그를 일별한다.
“어쩐 일인가? 한숨을 다 쉬고. 무슨 고민거라도 있나보지?”
“공작님 얼굴을 바라보면 모든 고민이 다 잊히죠… 라고 말하고 싶지만, 네. 고민 있어요. 하지만 말할 수 없어요.”
이것이야말로 진정 드문 일이었다. 루나는 오를레앙 공작에 한정해서는 나사가 빠진 것처럼 구는 여자였고, 그의 목전에 자신의 고민거리를 들고 와 한숨을 내쉬는 사람이 아니었다. 또한 들고 온 고민거리를 굳이 숨기는 여자도, 오를레앙 공작의 생각에는 아니었다. 어쩔 도리가 없이 신경이 쓰였다.
“무슨 일인지 말이나 들어 보지.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줄 의향도 있어.”
“오, 아뇨. 절대로요.”
의외의 연속이다. 공작은 흥미와 오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미소를 머금었다. 루나는 공작이 이런 식으로 비뚜름하게 웃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지금의 루나는 -그의 말에 따르면- 정말이지 근사한 이 미소에도 반응이 없었다. 창문을 쏘아보는 루나를 공작이 쏘아보는 구도가 만들어졌다. 둘 모두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으나, 명백하게도 이상한 구도였다.
루나는 머릿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고민해도 그에게 줄 것이 마땅치 않았다. 공작은 프랑스에서 첫손에 꼽히는 부자였고 권력자였다. 그가 원해서 가지지 못하는 것은 이 세상에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아름다운 보석도 귀한 옷감도 심지어는 사막 너머로부터 건너온 도자기도 공작에게는 흔해빠진 것들이었다. 그렇다고 루나가 그에게 프랑스의 왕좌를 건네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에게 바칠 수 있는 것 중 가장 진실되고 귀한 것은 사랑의 말들 뿐인데, 그조차도 공작에게는 가치가 없을 것이다. 괜히 우울해지는 기분이었다.
시간은 내달려 어느새 사월 십이일의 늦은 밤. 루나는 공작의 집무실에서 그의 업무를 돕고 있었다. 백작은 공적인 일들과 뒷공작을 동시에 해치우느라 언제나 바빴고, 루나는 아직까지도 그에게 줄 선물을 정하지 못해 속이 답답했다. 평소라면 한 번에 읽고 넘겼을 서류가 눈에 들어오지 않아 몇 번이나 되읽어야 할 정도였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공작이 아니었다. 그는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한 번 확인하고 루나에게 말을 건넨다.
“벌써 자정이 코앞이군. 피로해 보이는데 이만 들어가서 쉬지 그러나?”
“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다구요?”
루나는 하늘이 무너진다는 소식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놀랐다가 이내 절망했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근 며칠간 루나가 계속해서 고민하고 낙담해온 것을 알기에, 백작은 직설적으로 질문하기를 택한다.
“자네 요즘 좀 이상하군. 고민이 있으면 말하라지 않았던가?
자네가 갈피를 못 잡고 헤매니 업무의 효율이 나지 않아.“
루나는 효율 운운에 마음이 찔린 듯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또 어찌된 영문인지 날짜를 헤아리다가, 마침내 털어놓고야 만다.
“사실은…. 오늘이 공작님의 생일이잖아요.”
그래서 선물을 드리고 싶어, 고민 중이었어요. 수줍은 듯 덧붙인 말에 오를레앙 공작은 당황한 낯을 숨기지 못했다. 선물, 이라고. 이 나에게. 아주 뜻밖의 말을 들은 기분이었다. 선물이야 매년 넘치도록 진상받고 있건만, 낯설게 느껴지는 까닭은 왜일까.
그것은 아마 눈 앞에서 어쩔 줄을 몰라하는 주홍 머리칼의 여자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루나는 공작을 사랑하고, 공작은 그것을 알고 있다. 돌려주는 법이라고는 없는, 인식에 그칠 뿐인 앎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공작은 돌려받지 못할 사랑을 위해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여자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오를레앙 공작이 잠시간 말이 없자 루나는 더욱 부끄러워진다. 그는 애써 가볍게 상황을 넘겨 보려 너스레를 떨었다.
“아아, 정말이지. 공작님께 무언가를 드리고 싶었는데 못 가지신 것이라고는 없으시잖아요. 그래서 결국 못 정했지 뭐예요!”
“내가 못 가진 것이 없기야 하지.”
공작은 태연히 말을 잇는다.
“그러니 더 고민해보게. 내년 생일까지 말이야.”
루나가 고개를 번쩍 치들자, 그 반응이 만족스러워 공작은 웃음짓는다.
“내년에는 내가 만족할 무언가를 줄 수 있겠지? 기대하고 있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