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향기
딱복2025-04-25 00:27

청한이 선우 가문의 가솔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행운이었다. 남부의 유력한 문벌이자 대지주인 선우 가문이 어미와 생이별한 십 대 초반의 꼬마애를 선뜻 제 날개 밑에 받아준 것은 놀랄 만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가주 내외가 일대에 호인으로 유명한 이들이기는 했음에도 그랬다. 아마 자신이 그 댁 아가씨와 동갑인 이유도 있었을 것이리라고, 청한은 이따금 생각하곤 했다.

그는 열한 살 적에 아가씨의 놀이 동무가 되어 줄곧 저택 안에서 지내왔다. 어린애라고는 청한과 주인댁의 애기씨밖에 없는 대궐 같은 집. 청한이 제인 아가씨와 단짝이 된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주인 내외는 황송스러울 정도로 인심이 좋았다. 돌봐 주는 이라고는 없이 세상에 덩그러니 혼자 남은 소년을 먹이고 입히며 키워내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제인과 청한은 저택 후원의 꽃나무 아래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노송에 기어올라 까치집을 구경하며 성장했다. 그들의 유년기에는 귓속말로 이야기한 비밀들과 손가락을 걸어 잠근 수많은 약속들이 있었다.

그러나 넘지 말아야 할 선은 분명 존재하는 법이다. 청한은 그것을 열여섯이 되던 해에 불현듯 깨닫고야 말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제인의 눈에 어렴풋한 봄기운 같은 것이 넘실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자신의 손 잡기를 어느 순간부터인가 망설였기 때문에.

그 눈빛 속의 봄기운은 유년기의 종료를 알리는 일종의 효시 같은 것이었다. 꽃나무로 둘러싸인 모형정원같은 대저택에서 그들은 늦봄을 떠나보내었고, 청한은 제인을 이름이 아닌 아가씨로 부르기 시작했다. 제인은 그런 청한의 주변을 말없이 맴돌 뿐이었다.

열여섯을 기점으로 해 청한의 일상은 조금씩 변해간다. 아가씨의 나이가 찼으니 이제 놀이동무는 필요없게 되어, 그는 고용인으로서 일하게 되었다. 나이또래의 반반한 소년이 으레 그러하듯 유흥에 빠지거나 하는 일도 없이 삯으로 받는 돈은 전부 저금하며 열심이었다. 이별한 어머니를 찾아야 한다거나 저택을 떠나 가정을 꾸리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을 입 밖으로 낸 적은 달리 없었으나, 주변인들은 그가 무언가 목표하는 것이 있겠거나 하고 짐작하곤 했다. 그는 묵묵하고 성실하며 외로움을 타지 않는 청년이 되었다.

그것이 제인을 조금은 쓸쓸하게 하는 줄도 모르고.

제인은 이따금 곁눈질로 청한을 바라보았다. 사철 다른 꽃이 피는 정원에서, 햇살이 얼비치는 긴 복도의 모퉁이를 돌며, 창문 너머로 그의 그림자를 쫓으며. 놀이동무라는 것이 필요하지 않게 된 이래로 제인은 청한을 똑바로 쳐다보는 일이 드물게 되었다.

그것은 소녀다운 수줍음이라기보다는 지체 높은 아가씨로서의 배려였다. 제인은 청한을, 그래, 청한을 좋아했으나. 그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일이 불가능에 가까움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 고백의 순간에 청한이 얼마나 곤혹스러워할지도 마찬가지로 알고 있었다. 제인이 청한을 언제나 깊이 생각해 온 까닭이었다.

어느 밤 제인은 그가 자신을 밀어내야만 하는 합당한 이유를 가만히 헤아려 보았다. 꼽아 보자니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였다. 가슴에 뜨끔한 통증이 일었다. 몸이 욱신거리는 것이 성장통인지 전하지 못할 마음으로 인함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관자놀이를 타고 귓가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랑이었다.

어째서인지 사그라들지도 않는 연심을 품고, 제인은 스무 살이 되었다. 혼기를 훌쩍 넘긴 나이였다. 사교계에 발을 들인지도 사 년이 흘러, 제아무리 금지옥엽 외동딸이라고는 해도 더 이상 혼인을 미룰 수는 없게 되었다. 가주 내외는 여름이 지나기 전에 사윗감을 찾겠노라 선언하고 사람 물색에 열심이었다. 초여름의 후텁지근한 공기 탓일까, 문득 가슴이 터질 듯 갑갑하였다.

저택은 오전부터 종일 소란스러웠다. 남부 사교계의 유명인사만을 초대한다는 다회의 초대장을 받은 탓이었다. 제인 아가씨의 사교와 혼사는 가솔들에게도 당연히 중요한 일이었고, 그들은 제인을 누구보다 빛내기 위해 단장에 힘썼다. 직접 노동하는 사람들에 비할 바는 아니겠으나 제인에게도 고역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침나절부터 미리 골라 둔 불편한 옷을 입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머리칼을 말아올리고 분을 발랐다. 다회 시작도 전에 진이 빠질 판이었다. 제인은 견디지 못하고 하녀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저택 후원으로 도망치고야 말았다.

초여름의 정원은 초록빛 물결로 가득했다. 때맞추어 핀 붉은 장미가 햇살 아래 절정의 화려함을 뽐내고, 작약이 바람에 꽃송이를 흔들며 향기를 퍼뜨렸다. 제인은 따가운 햇볕을 피하려 정원사의 오두막이 드리운 그늘 아래 섰다. 이대로 잠시만 바람을 쐬다 돌아갈 작정이었다. 

그때, 문이 반쯤 열린 좁다란 오두막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제인이 화들짝 놀라 안을 들여다보자, 그가 있었다.

청한은 편한 차림을 하고 창고와 오두막의 중간쯤 되는 그곳에 웅크려앉아 정원가위를 손질하고 있었다. 정원사의 일까지 그가 맡아 할 필요는 없을 터인데, 부탁이라도 받은 모양이었다. 제인은 잠시 어쩔 줄을 몰라하다가 입을 열었다.

“…덥지 않아?”

어색하기 이를 데 없는 말이었다. 청한은 가만히 몸을 일으키며 대답한다.

“그늘진 곳인데다 바람이 통해 시원합니다. 아가씨께서도 더우실텐데요.”

말마따나 제인은 부풀린 치마에 꼭 맞는 상의를 입고 있었다. 청한이 고민하다가 말을 잇는다.

“건물로 돌아가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여기는 창고로 쓰는 공간이라 들어와 쉬실 곳이 못 됩니다.”

“아, 아냐. 잠깐만 있다가 금방 돌아갈 생각….”

조경수로 이루어진 간단한 미로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제인의 말이 멎었다. 제인의 머리칼에 장식할 꽃을 따러 나갔던 하녀들이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제인은 자신도 모르게 청한을 오두막 안으로 밀어넣고 자신도 그 안으로 들어갔다. 문 닫아 줘! 다급히 속삭이자 청한이 얼떨결에 오두막의 문을 닫는다.

“고마워. 사실 머리를 만지다가 잠시 도망나온 거라서, 하녀들에게 들키면 곤란… 할… 거야….”

제인이 소곤소곤 이어가던 말을 끝내 멈춰버린 까닭은, 자신이 청한의 가슴에 코를 박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오두막은 창고로 쓰인다는 말답게 지독할 정도로 좁았고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차 있었다. 옷을 망가뜨리거나 어딘가에 부딪치지 않으려면 청한과 온 몸을 밀착해야만 할 지경이었다. 청한의 팔이 자신의 어깨를 둘러안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설상가상으로 정원을 빠져나오던 하녀들은 오두막의 그늘에서 잠시 땀을 식힐 모양인지 그들과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 있는 꼴이 되었다. 얇은 판자로 된 문 너머로 그들이 사소한 이야기들을 조잘거리는 것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러나 제인의 귀에는 자신의 심장소리가 더 크게 들리고 있었다.

눈을 들면 자신을 내려다보는 청한의 눈이 보이고, 그것에 놀라 시선을 내리깔면 자신의 가슴과 맞닿은 그의 상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방금까지 일을 하고 있었음에도 깨끗한, 질긴 무명으로 만든 웃옷. 한 겹 천 너머로 그의 심장박동이 느껴지는, 익숙하지 않은 체향이 나는….

심장이 새처럼 파닥이고 있었다. 그것이 그대로 가슴을 뚫고 뛰쳐나올 것만 같았다. 그가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것만 같아 그랬다. 감정을 다스리려 고개를 젖히면, 곤혹스러워하는 청한의 얼굴이 보인다. 그래. 이성적으로 생각해, 선우제인. 이 남자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잘 알고 있잖아…. 그러나 올려다본 남자의 얼굴에는 엷은 홍조가 떠올라 있다. 가슴 속에서 날갯짓하는 작은 새. 

혀 끝에 맺혀가는 말들이 있다. 너는 어째서 얼굴을 붉히는 것이냐고, 그저 여자의 몸이 가까이 있어서일 뿐이냐고, 내가 너의 마음을 멋대로 오해해도 되겠느냐고, 묻고 싶은데. 전부 말해 버리고만 싶은데….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느새 하녀들의 발걸음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제인은 그 소리가 아주 들리지 않게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손을 뒤로 해 오두막의 문을 열고 뒷걸음질쳐 나왔다. 그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주워섬긴다.

“미안해, 갑자기…. 당황했지? 나도 마음이 급해서 실수를 해 버렸네. 나 이제 돌아가봐야 할 것 같아. 애들이 찾을 거야.”

마주보고 선 남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제인은 다시금 가슴이 욱신거리는 듯한 통증을 느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웃으며 발을 돌리려는데, 문득 청한이 말한다.

“괜찮습니다.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는 제인이 무언가 대답을 빚어내기도 전에 정원가위를 든 채 묵례를 하고 떠나가는 것이다. 멀어지는 그의 목덜미와 귓가가 벌겋게 익은 것은 햇빛과 더위 탓일까? 아니면 혹시….

저만치서 아가씨- 제인 아가씨- 하고 그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인은 소리쳐 대답하며 저택 안으로 들어간다. 가슴 속에서 작은 새가 날갯짓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