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의 정의와 서지컬 스틸 반지에 대하여
딱복2025-04-25 00:28

재산깨나 있는 독신 남자에게 아내가 꼭 필요하다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이다, 라고 누가 말했던가. 어느 나라의 대통령이었나? 아니면 저명한 석학? 사실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진짜로 중요한 것은, 그렇잖아도 정상성과 전통성 따위에 집착하는 이 나라 사람들 가운데 가장 보수적인 이들이 모여 사는 동네가 바로 여기, 스완레이크 시티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게 뭐가 문제냐고 한다면, 매니와 페란이 이 동네로 이사를 와서 결혼을 해버렸다는 것이 문제였다.

물론 진정한 사랑과 평생치의 맹세가 동반되는 ‘진짜’ 결혼은 아니었으나, 매니와 페란은 ‘결혼하자.’ ‘네, 네?’ ‘네라고 한 거다?’ 수준의 합의를 거치기는 했다. 결혼이라는 사회적 약속의 최소 조건을 쌍방의 동의라 친다면 둘은 어쨌거나 정말로 결혼을 해버린 것이다. 결혼의 목적이 서로의 삶을 나누며 행복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조직 보스의 뇌를 복제한 기억 디스크를 빼돌리기 위함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햇살이 화창한 날 같은 침대에서 일어나 오렌지 주스를 나누어 마실 때에는, 페란의 입장에서만큼은 정말로 결혼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당연하게도 페란의 왼손 약지는 비어 있었다. 둘의 결혼은 어디까지나 위장을 위한 사기결혼이었기에 둘 중 어느 쪽도 반지를 나눠가질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둘은 같은 침대를 썼고, 같은 집에서 살았다. 한 번 결혼했던 페란의 입장에서 그것은 꽤나 이상한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들이었다. 그다지 넓지 않은 집을 청소하고 함께 장을 보러 나가는 순간순간마다 그는 이전의 길지 않았던 결혼생활을 회상하곤 했다.

매니와 페란의 진짜같은 가짜 결혼생활은 풍족하지는 않지만 평화로웠다. 이대로 이 조용하고 번듯한 스완레이크 시티에서 이삼년만 뭉개면, 그들은 보스의 기억 디스크를 통해 어마어마한 돈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적어도 오늘까지는 그랬다.

사건의 시작은 다음과 같았다. 마틸다 부인은 강아지와 함께 동네를 산책하다가 매니와 페란의 신혼집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마침 날씨가 좋았고, 집집마다 환기를 위해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있던 상황이었다. 매니와 페란 또한 그랬다. 따라서 마틸다 부인은 창문을 통해 그들의 침실을 들여다볼 수 있었는데, 세상에. 침대에 베개가 하나뿐인 것이 아닌가!

물론 그들이 잠시 각방을 쓰고 있다던가, 둘 중 하나가 베개를 쓰지 않는 편을 선호한다던가, 어쩌면 지금까지 이 도시 사람들이 잘못 알았을 뿐 그들이 부부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자극과 가십에 목마른 마틸다 부인의 뇌는 그 모든 가능성들을 싹 다 걸러 버리고 아, 이거 뭔가 구린내가 나는걸! 하는 결론을 도출하고야 만 것이다.

마틸다 부인에게서 시작된 소문은 도시 내의 공원 두 개를 돌고 카페 세 곳을 거쳐, 다음날 오후 무렵에는 이미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살이 붙어 버리고야 말았다. 그때쯤에는 페란이 아내와 별거 중인 가장인데 젊고 반반한 매니에게 홀딱 빠져 집에 끌어들인 것이라는 줄거리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평화와 전통을 자랑으로 삼는 스완레이크 시티에서 이와 같은 가십은 폭탄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작은 도시의 주민들은 발칙한 소문에 열광했고, 이틀이 지나자 매니와 페란이 모르기 어려울 정도로 온 동네 사람들이 그들을 보며 쑥덕대고 있었다.

매니와 페란은 비상 가정회의를 개최하였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죠?”

동시에 뱉어 놓은 말이라고는 이랬다. 둘은 한참 침묵하다가, 생존을 위해 주섬주섬 의견을 꺼내놓는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키스라도 해야 할까요?”

“그랬다가는 열렬하게 사랑하는 불륜 커플로 인식될걸. 이야, 대담하네, 하는 소리나 듣겠지.”

“그러면 어떻게 해요?”

“가족 사진이라도 찍어서 걸어놓을까?”

“그건 괜찮은 것 같아요. 하지만 얼굴을 인쇄물로 남기는 건 좀 위험하지 않을까요?”

“그렇네….”

이후로도 몇몇 아이디어가 등장했으나 영 신통치 않았다. 이러다가는 정말로 온 도시에 발칙한 가정파괴범으로 기억되고야 만다. 그건 정말로 곤란했다. 그들은 눈에 띄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망명 범죄자의 철칙 아니던가. 그리고 무엇보다 억울했다. 우리가 뭘 위해 위장결혼을 하고 국외로 튀었는데! 결혼까지 했는데 불륜 오해라니!

생존 목적이라기보다는 오기의 발산에 가까운 마음이 되었지만, 둘은 어쨌거나 진심이었다. 페란이 공공장소에서의 키스를 제안할만큼. 약 두시간에 걸친 진지하고 눈물겨운 회의 끝에 둘은 최선의 결과를 도출해내었다. 낯은 팔리고 남은 평생 잠자리에서 이불을 발로 차고 싶어지겠지만 어쨌거나 모두가 믿어줄만한 작전을 짜낸 것이다.

매니와 페란은 다음날 오후 무렵 작전을 실행하기로 결의하고 같은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페란의 인생을 진창에 처박아놓고서도, 매니는 페란의 곁에서 언제나 무방비하게 굴었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페란이 마음만 먹으면 매니의 목을 졸라 버릴 수 있는데도, 심지어 그렇게 할 이유가 충분하다못해 차고 넘치는데도 매니는 페란의 곁에서 잠들어 있다. 어쩌면 페란이 지나치게 무른 사람임을 아는 까닭일지도 모르나, 어쩌면…. 신뢰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니 속이 기묘하게 울렁거렸다.

페란은 문득 자문한다. 나는 지금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거지? 내 삶을 망쳐놓은 사람의 곁에서, 그의 배우자 행세를 하며, 범죄에 동참하고, 내 삶을 점점 더 돌이킬 수 없는 낭떠러지로 밀어버리면서.

고요한 방 안. 매니의 고른 숨소리만이 정적을 간헐적으로 덧칠하는데, 페란은 저도 모르게 손끝을 움찔거린다. 그의 안에서 이성이 속삭였다. 지금이야, 페르디난드 리겔, 모든 걸 제자리로 돌려 놓을 수 있어. 당장 저 개자식의 목을 조르고 어디로든 도망쳐버리자. 넌 할 수 있어. 네 삶을 생각해!

그러나. 그럼에도…. 페르디난드 리겔은 매니를 죽일 수 없다. 그는 손을 들어올렸으나 고작 매니의 어깨 아래로 흘러내린 이불을 끌어올려주었을 뿐이었다. 어째서 그를 죽이지 못하느냐고 이성이 소리치는데, 가슴 속에서 무언가 불명확한 형체가 대답을 어물거린다.

… 그가 나를 믿고 있잖아. 내 앞에서 이렇게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데, 어떻게 그를 죽일 수 있겠어?

이 불명확의 이름은 아무래도 어렴풋한 정에 가까울 것만 같다.

페란은 이내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잠들었다.

 

이튿날 오후 다섯 시, 그들은 작전 시행을 위해 움직였다. 작전 시행 장소는 스완레이크 시티에서 가장 큰 공원의 노을이 가장 아름다운 언덕. 매니와 페란은 손을 잡고 공원을 가로지른다. 사람들의 시선과 속삭임이 꼬리처럼 따라붙었다. 어쩜, 염치도 없네. 사랑에 눈이 멀었나보지, 따위의 말들. 매니와 페란은 내심으로 코웃음을 친다. 두고 보라지. 당신들의 되도 않은 착각을 정통으로 반박해주겠어. 이윽고 다섯 시 반. 유난히 날이 맑아 어스름이 하늘을 뒤덮고 금빛 햇살이 나무 사이를 유영하는 것이 선명히 보였다. 작전을 시행하기에는 최적의 날씨였다. 

페란은 사전에 협의한대로 순진한 척 공원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어색하게 뚝딱이는 몸짓이었으나 그런대로 봐줄만했다. 매니가 곁눈질로 주변을 살피자, 평소와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다들 가십에 미쳐버렸군. 놀랄 준비들 하시지. 

“페르디난드.”

매니는 평생 내 본 적 없는 달콤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페란의 이름을 부른다. 모여든 사람들이 토끼처럼 귀를 곤두세우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페란이 진심으로 소름이 끼쳐 뒤를 돌아보자, 매니가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으며 손을 내민다.

“오래 참아왔지만 이제 더는 견딜 수 없어. 정식으로 집을 합치고 부부가 되자. 페르디난드 리겔, 나와 결혼해주겠어?”

범죄가 아닌 연기를 진로로 잡았다면 대성했을만한 연기력이었다. 부드러운 목소리에 실린 격정이 어찌나 선명하게 드러나던지, 관중들이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쉴 정도였다. 페란은 사전 합의대로 매니의 손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는다.

“내가 소중하게 여기던 반지를 당신에게 줄게. 이걸 우리 사랑의 증표로 삼자.”

이 대사와 함께 매니가 손에 끼고 있던 반지를 페란의 왼손 약지에 끼우자 한창 무르익었던 분위기는 절정에 달한다. 다들 무슨 로맨스 시트콤의 시청자라도 된 듯 몰입해서는, 만약 페란이 프로포즈를 거절한다면 폭동이라도 일으킬 기세였다.

“매니…. 나는 물론 좋아요. 우리, 결혼해요.”

페란은 제 왼손 약지에 자리잡은, 사실 아무 의미도 없는 서지컬 스틸 반지를 무슨 티파니 주얼리라도 되는 듯 바라보며 오른손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이어지는 열정적인 포옹. 노을지는 공원의 언덕 위가 둘을 위한 무대라도 된 듯 극적이었다.

짝, 짝, 짝짝짝…. 지켜보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박수를 치고 아름다운 정상성 수행에 감명을 받아 눈물을 훔치는 등 난리였다. 그 꼬락서니를 확인한 매니와 페란이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리며, 마지막까지 손을 꼬옥 맞잡고 공원을 벗어났다.

이것으로 둘은 불륜 커플이라는 오해에서 벗어나, 마침내 제대로 살림을 합친 신혼부부라는 확실한 알리바이를 가지게 되었다. 페란의 심란함과 수치 따위가 고려되지 않았다는 단점이 있으나 어쨌거나 효과는 확실했다.

매니와 페란은 인적이 드문 거리에 이르러서야 손을 놓고 땀이 찬 손바닥을 바지에 쓱쓱 문질러 닦았다. 거창한 안도의 한숨이 뒤따른다. 

“좋아. 훌륭했어, 아저씨. 이 정도면 아무도 우리의 결혼 사실을 의심하지 않을거야.”

“매니도 수고했어요. 대단한 연기였어요.”

둘은 잠시 시선을 교환하며 동지애를 나눈다. 그러던 페란이 자신의 왼손을 내려다보며 머뭇거리자, 매니는 아무런 무게감도 없이 툭 내뱉었다.

“아, 반지는 그냥 가져. 계속 끼고 있어야 사람들이 끝까지 믿겠지.”

페란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해가 완전히 저물어 집에 돌아가는 길은 어둡고, 작전의 흥분이 가라앉자 이상하게도 우울하였다. 시선을 내리면 왼손 약지의 반지가 어렴풋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곳에 진짜 반지가 자리했던 때가, 그에게도 있었다. 마치 수십 년 전의 일인 듯 아득한 기억이었다. 그때와 지금의 페르디난드 리겔은 완전히 별개의 인물인 듯 달라졌기에 그러했다.

페란은 아주 명백하게, 속박되어 있는 감각을 느낀다. 그의 삶과 타인의 삶이 반지 하나를 통해 연결되어 있는 감각을. 이 반지의 주인도 언젠가 그의 곁을 떠나게 될까? 아직은 알 수 없는 미래를 점쳐보자면, 분명 홀가분해야 하는데. 그것이 맞을텐데, 이상하게도 쓸쓸해지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