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하신 제국의 신 아이작은, 신관을 교화하기 위한 용도로 교회 지하에 조성되어 있는 감옥의 문을 조잡한 내려침으로 하나하나 막아버렸다. 손을 수십 번이나 찧었기 때문에 나중에 가서는 사도 루시 경의 조력을 받아야만 했다.
진작 루시에게 맡겨 버렸더라면, 혹은 적어도 도구를 사용했더라면 손이 다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작이 벌겋게 부푼 주먹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홀가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루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신관들은 아이작의 무도한 행태에 얼굴이 시뻘개지도록 분노했으나 직접적으로 항의하는 자는 없었다. 첫째로는 아이작이 지하 감옥으로 내려오기 직전에 대신관을 위시로 한 고위 사제들의 목을 전부 날려버렸기 때문이었고, 둘째로는 루시가 감옥의 청동 문고리를 맨손으로 으깬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아이작은 해야만 하는 일을 수행한 사람마냥 신전을 벗어났다. 루시는 묵묵히 그 뒤를 따른다. 황도를 따라 황궁으로 향하는 내내 백성들의 경외 섞인 시선이 그들의 뒤를 물고기 떼처럼 쫓았다. 몇몇 용기 있는 자가 아타락시아 님 만세! 하며 외쳤다. 50년 전쟁을 종식시키고 바르톨로메오 공작의 반란을 진압한 지금, 아이작은 그 어느때보다도 열렬한 지지와 숭배를 받고 있었다. 민중으로부터의 인기만큼은 황태자의 그것과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나는 황궁에서 궁내부 대신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해. 함께하겠어, 루시?”
“글쎄, 내가 동석하면 그가 겁먹지 않을까?”
아이작은 그 말에 짧게 웃음을 터뜨린다. 확실히, 이전의 전쟁을 거치며 루시가 보인 무용은 평생 펜대만 잡아온 늙은이를 겁먹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렇다면 황궁 대정원이라도 구경하고 있는 게 어때? 조경이 그럴싸한데다 과실수가 많아. 지금이라면 체리가 잘 익었겠군.”
“좋아.”
“대화가 끝나면 내가 그리로 갈게. 이후에 중앙 서고에 들르자.”
마지막 용건이야말로 루시가 진정 바라는 것이었다. 그의 오랜 숙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황궁 깊은 곳에 감추어진 비밀과 억지로 묻어둔 이야기들이 필요했다. 루시는 대정원을 뒤져 체리를 한 줌 따먹고 손을 깨끗이 씻은 후 아이작을 기다리기로 정한다.
“그새 훌쩍 성장하셨군요, 아타락시아 님. 반 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궁내부 대신인 페트라르카는 유약하고 감상적인 늙은이였다. 나이 스물의 아이작이 조금 성숙해진 것만으로도 감상에 젖어 눈물을 찍어내었으니 할 말은 다 한 셈이었다. 아이작은 질린 낯으로 그가 세월의 흐름에 대해 곱씹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슬라나와의 접경지에서도 바르톨로메오 공작령에서도 큰 고생을 하셨다지요. 그나마 곁에 두신 사도의 무용이 뛰어나 안심입니다.”
그러나 페트라르카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다. 저렇게나 감성적이고 연약한 이가 노인이 될 때까지 궁내부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그랬다. 지금만 보아도, 아이작을 염려하며 꺼낸 안부의 행간에서 궁내부의 정보력이 국경에까지 닿아 있다는 점을 읽어낼 수 있었다.
“대신께서 염려해주신 덕에 잘 지내었습니다. 제 근황을 잘 아실 정도라면 제가 귀하를 왜 찾아왔는지도 필히 알고 계시겠지요?”
“하하하, 아타락시아 님께서도 정말이지 어른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씀하실 줄이야. 이 늙은이, 너무 놀라 심장이 떨어질 뻔 했습니다.”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린 페트라르카는 의자 등받이에 길게 몸을 기대었다. 그것은 상대가 원하는 것을 손에 쥐고 있는 이 특유의 자신감이었다. 아이작은 가면 같은 낯으로 웃으며 이어질 말을 기다린다.
“그것은 본디 폐하의 것이었습니다. 이 제국의 모든 것이 그리하듯이요.”
“… 역시 그랬군요.”
“신의 유산이라 불리는 그 열두개의 귀물은 폐하의 뜻에 따라 첫째 가는 충신들에게 나누어졌지요. 아주 비밀리에 말입니다.”
페트라르카는 조심스럽게 옛 비사를 풀어놓았다. 아이작은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황궁의 안살림을 맡아 보는 궁내부의 수장은, 아이작의 예상대로 많은 정보를 쥐고 있었다. 어쩌면 아직 말해주지 않은 것들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페트라르카는 긴 이야기 끝에 조심스럽게 덧붙인다.
“제가 아타락시아 님께 바친 이 호의와 충정을 부디 알아주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노회한 도박꾼이 흰 말에게 전 재산을 쏟아붓겠노라 외치는 소리였다. 아이작은 예의 깨끗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물론입니다, 친애하는 페트라르카.”
대화를 마칠 무렵이 되자 찻물 안의 얼음이 다 녹아 있었다. 아이작은 시원하고 쌉싸름한 냉차로 입술을 축이고 궁내부 대신에게 인사를 건넨 후 황궁의 정원으로 향한다. 황궁의 대정원은 지나치게 넓었으나, 아이작은 과실수가 어디에 있는지를 잘 알았따.
루시는 예상대로 정원의 남서쪽, 과실수로 둘러싸인 푸른 지붕의 가제보 아래에 서 있었다. 그는 아이작에게 체리가 아주 맛있었으며 분수대에서 손을 씻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루시가 문득 손을 펴 보인다. 그의 큼직하고 단단한 손바닥 위에는 날개를 다친 새 한 마리가 누워 있었다.
“어미를 잃은 모양이야. 그대로 두면 죽을 것 같아서 돌봐주려고.”
아이작은 이유도 모르는 채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기분이 되었으나, 입술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갈음했다. 황궁 부지 가장 심처에 있는 중앙 서고로 향하는데, 회랑 저편에 수행원 둘만을 대동한 엔리케 황태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아이작과 루시는 예를 취한 채 그가 빨리 꺼져 주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네까짓 게 애를 쓴들 뭘 할 수 있다고 그러느냐?”
숙인 머리 위로 대뜸 모욕이 날아들었다. 아이작은 놀라지 않았으나 그것이 불쾌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엔리케가 불쾌한 낯을 한 채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네놈이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모를 것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음흉한 놈 같으니라고.”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엔리케는 아이작에게 무언가 쏘아붙이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그것마저 시간 낭비라는 태도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곧장 루시를 응시한다.
“자네가 루시 경이지? 자네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네. 그러나 어째서 아타락시아의 개가 된 것인지는 이해할 수 없군.”
루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나의 검이 되지 않겠는가? 자네에게 검수로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영광을 주지.”
“아뇨. 저의 길은 이곳에 있습니다.”
그 무도하기까지 한 거절에, 엔리케 황태자는 구정물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이를 악물었다. 아이작은 내심 그가 손을 들어올리거나 소리칠 것이라 예상했으나 엔리케는 분노를 참아내며 고개를 돌린다.
“어리석고 무례하군! 네 선택을 후회할 날이 분명 올 것이다.”
황태자는 소낙비처럼 순식간에 멀어져가고, 아이작과 루시는 눈을 마주친 채 한동안 말이 없다가 픽 웃음짓고야 만다. 그들은 다시 걷기 시작한다.
여름날은 강물처럼 흐르고, 수도에서의 볼일은 모두 끝이 났다. 아이작과 루시는 신의 유산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수집해 다음 목적지를 정하였다. 그들은 서쪽으로 향할 것이다.
“루시, 뭐 하고 있어?”
아이작은 여장을 모두 꾸린 후 창가에 뒤돌아선 루시에게로 다가간다. 루시는 오른손 위에 다갈색의 작은 새 한 마리를 올려둔 채 그를 돌아보았다. 아이작은 그 새를 어렵잖게 기억해냈다. 몇 주 전 황궁 대정원에서 주웠던 새다. 작은 것들은 어쩌면 이리도 빨리 크는지, 루시의 손바닥을 쪼고 날갯짓을 하는 테가 제법 야무졌다.
“이제 날려보낼 때가 된 것 같아서.”
새의 깃 위로 바람이 스친다.
“아기 적부터 사람의 손을 탔는데도, 날아갈 수 있을까?”
루시가 창문 너머로 팔을 뻗어 새를 높이 들어올렸다. 강물처럼 푸른 하늘에 구름이 선명한데, 바람은 물결마냥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어린 새는 금방이라도 뛰어올라 날아갈 듯 날개를 파닥인다. 아이작은 그 새가 두려워하고 있을까에 대해 생각한다.
루시는 비둘기의 깃처럼 흰 머리칼을 휘날리는 아이작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서린 아주 엷은 긴장감과 알 수 없는 기대감을 읽는다.
“새가 진정으로 염원한다면, 분명.”
둘의 시선이 마주닿았다가, 이내 날개를 펼친 새에게로 향했다. 그것은 몇 번의 시도 끝에 루시의 손을 박차고 난다. 파닥이는 소리는 미약한데도, 비틀거리면서도.
“그걸 모르고 있다면 누군가가 도와주면 돼. 깨달을 수 있을 때까지 도와준다면 분명 날 수 있을 거야.”
점으로 멀어지는 새를 끝까지 바라보며 확언하는 루시의 옆얼굴은, 흩어지는 붉은 머리칼로 인해 불꽃처럼 찬란하다. 아이작은 눈이 부심을 느낀다. 날 수 있을 거야, 마음 속으로 되뇌어 보는 말은 미약한데도. 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