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설야의 이야기
딱복2025-04-25 00:51

얼굴 없는 신의 현신이자 만들어진 신이며 동시에 황가의 노예인 자, 아타락시아. 자유를 갈망하는 흰 새. 그는 마침내 황궁을 벗어나 맹우 루시와 함께 길고도 지난한 여정에 올랐으나... 어처구니 없게도 여정 도중의 노상에서 동사할 위기에 처하고야 말았다.

메겐베르데의 대설원을 걸어서 횡단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그릇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신의 이름을 가졌던 사내- 아이작은 생각한다. 아니, 도보 횡단 자체는 현명한 선택이었다. 트로이메라이 영지로부터의 추적을 뿌리치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과감함이 필요했다. 루시와 아이작의 패착이 있다면 겨울 날씨의 변덕을 예측하지 못했다는 것 뿐이리라.

눈은 살벌하게도 내렸다. 황궁의 창문 너머로 바라보던, 솜털처럼 아름답던 그것과는 아예 다른 물질인 것만 같았다. 발목까지 잠길 정도로 쌓인 눈은 오감을 앗아간다. 가시거리가 평소의 반도 되지 않았고, 사지의 말단은 시리다 못해 감각이 없어진 지 오래였다. 아이작과 루시는 본능적으로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야 말았다. 이토록 허무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지금까지의 여정이 이 설원에서 마무리되는가. 루시와 아이작이 이러한 생각 속에서 서로를 마주보던 그 순간.

울부짖는 듯한 배기음이 저편으로부터 들이닥쳤다. 회백색의 풍경 한가운데에 주홍빛 점이 떠오르는가 싶더니, 설원과는 어울리지 않는 황동색의 마도 모터 자동차가 쌓인 눈을 짓이기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눈으로 인해 현실감을 잃어 가던 루시와 아이작은 저도 모르게 멍청한 표정으로 입을 벌린다.

두 여자가 자동차의 문을 열고 눈밭에 내려섰다. 쾌활한 태도로 추위에 감탄한 갈색 머리칼의 여자가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야, 눈이 끔찍하게도 많이 오네요! 아이작 씨, 루시 씨, 괜찮으신가요?”

대단히 천연덕스럽고 명랑한 태도였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부적절하게 들릴 정도였다. 아이작은 여전히 얼떨떨한 채로 그의 이름을 부른다.

“아세라 씨...?”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어서 타세요. 두 분, 새빨갛게 얼어붙었다구요.”

크림힐트가 적절하게 끼어들어 둘을 차에 태웠다. 몸이 굳어 있는 탓에 자동차에 들어가 앉는 것도 고역이었다. 뒷좌석의 가죽 시트에 나란히 앉은 루시와 아이작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살았다, 하는 안도가 들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평원은 자동차로 가로지르니 금세 끝을 보였다. 그들은 외딴 곳에 홀로 서 있는 여관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하루를 묵기로 정했다. 당장 메겐베르데의 경비를 뚫고 내성에 잠입하는 것은 무리였다. 루시와 아이작에게는 휴식이 절실했다.

얼어 죽기 딱 좋은 날씨였지만 여관에는 장작이 넉넉했고, 눈은 질릴 만큼 있었기에 더운물에 몸을 푹 담그고 씻을 수도 있었다. 여관 주인은 말수가 적은 중년 부부였는데, 아이작이 삯을 넉넉하게 내미니 두말 않고 나무로 된 욕조 두 개를 루시와 아이작의 방에 넣어 주었다. 

루시와 아이작, 그리고 아세라와 크림힐트는 여관의 1층에서 함께 식사했다. 양젖 치즈와 거친 빵, 그리고 모든 여관의 난로마다 항상 끓고 있는 영원의 스튜로 이루어진 질박한 요리를 앞에 두고 그들은 먹는 것에 집중했다. 한참 눈밭을 헤맨 두 사람과 한참 차를 탄 두 사람은 그것을 훌륭한 정찬이라도 되는 양 먹어치운다. 향이 진한 치즈와 고소한 빵은 잘 어울렸고 스튜의 더운 국물이 속을 풀어 주었다. 반나절 전에 죽을 위기를 넘겼다는 사실을 거짓말처럼 느끼게 해 주는 맛이었다.

배가 찬 아이작은 편안한 한숨을 내쉬며 나무의자의 등받이에 기대었다. 아세라가 붙임성 좋게도 말을 건네왔다.

“이제야 좀 산 사람처럼 보이네요. 아까는 정말이지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구요! 두 분을 그런 곳에서 재회하게 될 줄이야. 무모하셨어요, 아이작 씨.”

“갑자기 폭설이 쏟아질 줄은 몰랐습니다. 아세라 씨와 크림힐트 씨가 와 주셔서 살았어요.”

크림힐트가 새초롬한 표정을 지었다.

“아세라의 말마따나 무모했습니다. 두 분이 이렇게 막무가내인 줄은 미처 몰랐어요.”

아이작은 하하, 하고 맥없이 웃음으로 대답을 무마한다. 아이작과 루시라고 해서 자신들의 계획이 지나친 위험부담을 안고 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길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쫓기는 자들은 시야가 좁아지기 마련이었고, 도주를 위해서는 위험을 감내해야만 하는 순간들이 온다. 그러나 그것을 눈 앞의 여자들에게 털어놓을 필요는 없었다. 묵묵히 치즈를 잘라 먹던 루시가 말한다.

“대단한 우연입니다.”

아이작은 미리 짜기라도 한 듯 그의 말을 받았다.

“그러게나 말이에요. 이 짧은 시간 동안 두 번이나 마주치다니. 누가 보면 계획적인 만남인 줄 알겠어요.”

부드러운 말투만 아니었더라면 충분히 공격적으로 들릴 말이었다. 아이작은 여전히 웃고 있었으나, 말 속에는 은근한 가시가 들었다. 아세라와 크림힐트가 스푼을 든 채로 시선을 마주했다. 잠시간의 망설임. 직후 아세라가 얕은 한숨을 내쉰다.

“구명의 목적도 분명히 있었어요.”

그것은 긍정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아이작도 루시도 놀라지 않았다. 우연을 가장한 접근 따위에 배신감을 느끼기에는 두 사람이 겪은 일이 많았다.

“구해 주신 것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목적은?”

루시의 질문에 크림힐트가 그를 직시했다. 보석처럼 사랑스러운 분홍빛 눈이었으나 시선은 날카롭게 여겨질만큼 올곧다.

“협력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두 분이 최종적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같은 궤적을 그리며 나아가고 있다면 손을 잡는 것은 어렵지 않겠지요.”

아이작과 루시는 잠시간 신중한 낯을 하고 눈을 맞추었다. 그들은 무언의 대화를 나누듯 서로를 응시했고, 이내 아이작이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그것은 어렵겠습니다.”

“어째서요? 아이작 씨에게도 루시 씨에게도 좋은 제안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아세라가 눈썹을 찌푸렸다. 사실 루시에게 있어서는 정말로 나쁠 것 없는 제안이었다. 기실 루시는 그들에게 아무런 유감도, 그들을 믿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아이작의 눈 속에 깃든 날선 긴장과 경계를 읽었다. 그것을 알게 된 이상 루시의 답은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이작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루시는 묵묵히 고개를 젓는다. 아세라와 크림힐트는 다소 실망한 듯 했으나 두 번 권하지는 않았다. 저녁 식사를 마무리한 네 사람은 각자의 방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창 밖은 고요해 눈 위로 눈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았고, 이따금 이름모를 밤새가 울 뿐 짐승의 소음도 없었다.

루시와 아이작은 버릇처럼 일찍 눈을 떴다. 밤이 긴 계절이기에 해가 뜨려면 아직도 몇 시간은 기다려야 하는 이른 새벽이었다. 온 세상을 뒤덮어 버리기라도 할 듯 끈질기게 내리던 눈은 밤새 그 기세를 잃어, 눈발이 한결 가늘어져 있었다. 

“눈이 한 풀 꺾였어. 떠나려거든 지금이야.”

아이작은 어슴푸레한 창 밖을 바라보며 옆에 선 루시에게 말했다. 어제 저녁의 식사 자리에서 웃음짓던 낯은 어디로 가고, 싸늘할 정도의 무표정이었다.

“협력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생각했는데.”

루시가 나직하게 말하며 계단 위, 닫힌 방 문을 흘긋 돌아보았다. 아세라와 크림힐트가 쓰는 방의 문이었다. 잠시간 침묵을 유지하던 아이작은 짧게 긍정한다.

“그래, 나쁘지 않았겠지.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었을 거야.”

루시는 그의 말 뒤편에 숨겨진 ‘하지만’을 읽어내었다. 그는 묻는 대신 아이작의 말을 기다리기를 택했다. 그것이 루시가 아이작을 배려하는 방식이었다. 아이작은 씁쓸하게 웃음짓는다.

“그래, 루시. 나는 조금 두려웠던 것 같아. 염려하고 경계하다 못해, 두려웠어.”

아이작은 창가로 다가선다. 그의 차가운 날숨이 유리에 닿아 추상적인 얼룩을 그려내었다.

“그들도 인간의 집합이야. 알고 있잖아, 루시.... 인간들이 모이면 놀랄 정도로 이기적이고 악해질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나의 모든 생을 통해 그것을 배웠어.”

“그래.”

담담한 긍정을 건네며, 루시는 아이작의 흰 머리칼과 그것이 드리운 마른 어깨를 바라본다. 아이작은 작은 체구가 아니었고 신체를 단련한 사람이었으나 루시에 비한다면 왜소했고, 그가 가진 희고 푸른 색채가 그 인상을 강화했다. 그래서일까, 아이작이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를 아는 루시조차도 가끔은 그가 가냘파 보일 때가 있었다.

“지금이야 우리와 목적이 겹칠지도 모르지. 옳은 일을 위하고 있을 수도 있어. 하지만 그것이 뒤집히는 것은 순식간일지도 몰라. 어쩌면 황가에서 그랬듯 나를 이용하려 들 수도 있어.”

아이작은 루시를 돌아본다. 새벽빛에 젖은 창백한 옆얼굴.

“그게 두려워.”

루시는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둘의 삶은 아주 다른 형태로 빚어져 있었고, 심지어 루시의 경우 어린 시절의 기억이 없기까지 했다. 따라서 루시는 아이작의 공포와 경계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미래를 약속한 맹우였기에, 루시는 아이작의 곁에 마지막까지 서 있을 것이기에.

“네가 그렇다면 지금 떠나자.”

“...고마워.”

루시는 자매처럼 보였던 아세라와 크림힐트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그들은 루시와 나이 차이가 크지 않을 것 같았으나 활달한 태도 탓인지 더 어리게 여겨졌다. 그런 그들을 동행인으로 삼는 것을 상상하니 염려가 앞서고야 만다. 아이작과 루시가 지금까지 겪어 온 여정은 그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위험하고 잔혹했다.

아이작과 루시는 곧장 방으로 올라가 여장을 꾸리기 시작했다. 긴 여행을 위한 짐이었음에도 챙겨야 할 것이 몇 없었다. 둘은 단단하고 납작한 트렁크를 든 서로의 모습을 보며 쓰게 웃는다.

여관의 문을 열고 나오니 평원의 저편이 밝아오는 것이 보였다. 가슴 속이 얼어붙을 것처럼 찬 공기를 들이켠 아이작이 먼저 눈 위로 발을 내디뎠다. 둘은 말 없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걷기 시작했다. 길 없는 눈밭 위를, 그러나 자신들이 어디로 가야 할 지를 알고 있는 듯이.

아직 일출은 멀었고 어두운 하늘로부터 눈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이어지는 여정도 분명 춥고 고단하리라. 둘 모두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괜찮았다. 등을 맞대고 버틸 맹우가 있다면 가야 할 길의 끝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다. 해가 뜨지 않았더라도, 분명.

그들은 아직 어두운 하늘 아래로 긴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