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현제와 유서화는 두 번째의 멸망의 목전에 서 있다.
허무한 회색의 하늘로부터 끝없이 눈이 내리고, 마천루의 꼭대기에 선 두 사람은 희게 빛바랜 지평선을 바라본다. 마치 세상에 단 둘만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기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천 일째 이어진 폭설과 원인 미상의 전염병으로 인해 인류는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감염된 이들은 아무런 증상도 없이 별안간 쓰러져 먼지가 되었고, 그 먼지 위로 눈이 내려 흔적을 덮었다. 각성자들은 비교적 오래 살아남았으나 그뿐이었다. 무명의 전염병은 제아무리 강한 자에게도 공평히 찾아왔다. 언젠가 반드시 맞이해야 할 죽음이 극적인 형태로 주어지듯, 피할 방법이라고는 없이.
거대한 고요가 그곳에 있었다.
이제 머지않아 ‘그것’은 일어날 것이다. 유서화는 첫 번째 도전에 실패했다. 세상은 한심할 정도로 쉽게 부서지리라. 성현제는 되돌아갈 것이고, 유서화는 다시 시작해만 한다. 각오했던 일임에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두려웠다. 그러나 유서화는 뛰어들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이 사람을 이토록 무모하게 만드는 것임을 이전의 유서화는 알지 못했다. 그는 사랑을 모르는 채로 살다가 성현제를 만났고, 사랑의 모든 것을 그에게서 배웠다. 부드럽고 굳건한 친애로부터 불타는 것만 같은 열애까지가 전부 그로부터 비롯된 유산이었다. 유서화에게 있어 사랑의 형상은 곧 성현제의 얼굴이 되었다. 그의 웃음과 손짓이 사랑의 지표였다. 자신의 삶도 세계의 미래도 성현제를 위해서라면 내던질 수 있었다. 그를 구하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을 낯설게 바라보던 그의 눈을 마주했을 적에는 어찌할 도리도 없이 슬퍼지고 말았다. 첫 번째의 세상에서보다 조금 옅어진 듯한 눈동자. 이전에는 없었던 권태가 희미하게 깃들어 있던 시선. 유서화는 자신이 진정으로 치러야 할 대가가 무엇인지를 그 때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볼에 와닿는 눈송이가 차갑다.
“어쩌면 자네와 내가 최후의 생존자가 될지도 모르겠어.”
성현제는 기이할 정도로 태연했다. 분명 그는 기억하지 못할 텐데도, 마치 이러한 종말의 순간을 겪어 본 사람처럼.
“지구 최후의 이 인이 된 기분이 어떠신지.”
유서화는 성현제의 침착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가 이 멸망을 이전에도 겪었고 앞으로도 겪어야 할 일처럼 대하고 있는 것에 속이 상했다. 그에게 있어서는 이번 세상이 처음이자 마지막과도 같음을 알고 있음에도 그랬다.
“나쁘지 않군. 이상한 일이야.”
그는 눈으로 덮인 채 죽어가는 지평선을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어쩌면 자네와 함께 있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해.”
“그건 정말로 이상한 일이네요.”
두 번째 삶을 살아가며 유서화는 포기에 대해 배웠다. 그는 이전의 삶에서 성현제가 가르쳐 준 사랑을 하나씩 떼어 버리려 안간힘을 쓰며 살았다. 생살을 잘라내는 것처럼 고통스러웠으나 그래야만 함을 느꼈다.
“...자네 아직도 모르는 척 하기야?”
그러나 성현제는 언제나 유서화로 하여금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남자였다. 두 번의 생을 지나오며 그는 조금 변했으나, 유감스럽게도 이런 면만큼은 아직 그대로였다. 유서화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린다.
“어쩔 수 없는 사람이로군.”
성현제는 무언의 거부를 산뜻하게 수용한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입씨름으로 보내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혼잣말처럼, 그러나 들으란 듯이 말하기 시작한다.
“돌이켜 보면 자네는 참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었어. 나는 눈치가 아주 빠른 편인데도 자네를 종잡기가 어려웠다네.”
눈발은 더욱 짙어져 곧 지평선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자네는 이따금 나를 아주 그리운 것을 보듯 바라보곤 했어. 하하, 내가 알고 있어서 놀랐나? 말했잖나. 나는 눈치가 아주 빠르다고....”
성현제의 입가로 흰 입김이 흩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절대로 내게 다가오지 않았지. 그 또한 의외였다네.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여기는 것처럼 나에게서 멀어졌어.”
그는 천천히 미소짓는다.
“나는 그래서 더욱 자네를 가지고 싶었어. 이제 와서는 소용 없는 이야기지만 말일세.”
유서화는 성현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를 바라보면 괴로울 것을 알면서도, 그가 보고 싶었다.
“이제야 나를 봐 주는군.”
사랑을 동력으로 삼아 벌인 일의 완성을 위하여 사랑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럼에도 유서화는 멈출 수 없는 걸음을 내디딘 지 오래였다. 이미 그의 손은 피에 물들어 붉고 떠나온 길에는 수없는 시신이 쌓여 썩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이 남자를 끝없는 되풀이로부터 건져낼 수만 있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때로는 견딜 수 없이 아프고 두렵다고 해도, 사무치도록 외로운 순간들이 닥친다고 해도.
지평선 저편으로부터 무엇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눈보라를 휘감고 세상을 삼키며 멸망이 오고 있었다. 유서화는 마지막이 가까워 옴을 직감한다. 첫 번째 종말에는 고통이 없었다. 이번에는 어떨까. 아직까지는 고통이 싫었다. 유서화는 그것을 다행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길드장님.”
성현제를 부른 것은 충동으로 인함이었다.
“왜 그러지?”
유서화는 잠시 망설인다. 앞으로 몇 분이면 그들은 죽을 것이고 세 번째 세상에서 눈뜨리라. 그러니 이것은 작별이 아니었다. 새삼스러운 말 따위, 남겨 보았자 그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러나.
“저는 반드시, 당신을 구할 거예요.”
그러나.
이것은 유서화를 위한 말이다. 그가 스스로에게 새긴 주문이었다. 앞으로 수없이 찾아올 고통과 두려움 앞에서 꺾이지 않기 위해 되뇌어야 할 유일의 교리였다. 천 번의 세계를 뛰어넘고 만 번의 멸망을 더 겪어야 한대도 유서화는 성현제를 구할 것이다. 그가 유서화에게 사랑을 가르쳤기 때문에, 유서화를 진정으로 살게 했기에.
성현제는 의아한 눈을 하고 유서화를 바라볼 뿐 대답이 없었다. 유서화는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아녜요. 기억하지 마세요.”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다고, 그는 생각한다. 유서화는 두 번째의 죽음 앞에서야 비로소 각오를 굳혔다. 성현제가 얼마나 변하더라도 상관없었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알아보지 못하더라도 괜찮았다. 이미 성현제는 유서화에게 삶을 주었으니 이제는 유서화가 성현제를 구할 차례였다. 두렵지 않았다.
유서화는 가슴을 펴고 눈앞의 멸망을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