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 타임을 함께하죠,”
그것은 제안이라기보다는 이미 확정된 사안에 대한 통보에 가까웠다. 제이는 멍청하게 눈을 깜빡인다.
“...저요?”
“당신이 아니면 누구겠습니까? 알고 있는 것은 많은 주제에 가엾게도 멍청하군요. 홍차를 마실까요? 홍차가 싫다면 일본식으로 말차를? 나는 격불을 제대로 할 줄 안답니다.”
그러나 제이는 격불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그는 그나마 이름이라도 들어 본 쪽을 고르기로 마음먹는다.
“홍차로 할게요.”
“좋습니다.”
메피스토는 언제나처럼 피에로 혹은 마술사 행세를 했다. 테이블 앞에 선 그가 과장된 동작으로 흰 레이스 테이블보를 까는 순간, 뜨개 티코지를 입은 도자기 주전자와 섬세한 덩굴장미가 그려진 찻잔 세트 두 개, 그리고 삼 단짜리 티푸드 트레이가 나타난 것이다. 제이는 놀라지 않았다. 그저 부담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티 세트로부터 전해지는 알 수 없는 압박감에 미간을 찌푸릴 뿐. 이 정도에 놀라서는 메피스토의 곁에서 버틸 수 없다. 그러나 우아하게 구는 것은 역시 어려운 일이다.
발코니로 이어지는 높고 커다란 창문으로부터 오후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창가로 향해 있는 뺨이 따끈해질 정도로 환한 빛이었다. 반짝이는 다갈색 찻물. 제이는 찻잔에 입술을 대고 차를 홀짝이며, 자신이 이 섬세한 물건을 제대로 쥔 것인지를 고민한다.
“갑자기 어쩐 일이냐고 묻고 싶은 모양이로군요.”
그는 히죽거리며 손에 든 티스푼을 허공에 휘저었다. 메피스토 펠레스라는 남자는 서구의 문명이 쌓아 올린, 복잡하기 짝 없는 허례허식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모든 규범과 예의에 설탕 섞인 흙물을 끼얹기를 즐긴다. 과장스러운 제스처와 연극적인 말투. 제이는 이따금 메피스토 펠레스의 면면을 만화경에 빗대어 생각해 보고는 했다.
“별 것 아닙니다. 아직 당신에게 차를 대접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서 말이에요.”
은빛 티스푼이 햇빛 아래 복잡한 궤적을 그린다.
“명색이 당신의 후원자인데 이렇게 무심해서야 곤란하죠. 안 그런가요?”
“아뇨, 괜찮은데....”
제이는 소심하게 항변했으나 메피스토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쓸 데 없이 잘생긴 낯으로 광대처럼 눈을 찡긋해 보일 뿐이었다. 제이는 씁쓰레한 차를 홀짝거리며 메피스토의 얼굴을 응시한다. 잘 생기기는 했다. 하는 짓이 이상스러워 잘생김이 가려지기는 하지만, 그가 미남자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악마는 인간을 홀리기 위해서 저런 얼굴을 택하는 걸까? 대놓고 묻기에는 뭣한 질문이라 속으로만 생각해 본다. 그러고 보면, 오며가며 안면을 튼 아마이몬만 해도 마찬가지로 행색이 이상할 뿐 얼굴 생김은 나쁘지 않았다.
눈 앞의 메피스토는 설탕 막대를 홍차에 녹이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 큰 키를 하고,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여서는. 제이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과시적인 동작으로. 제이는 메피스토를 좋아했으나 동시에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지면 속의 인물일 뿐이던 시절에도 그는 미지로 가득 차 있었는데, 눈 앞에 살아 움직이는 실존이 되니 더욱 알 수 없어졌다. 사마엘이라 불리는 악마의 얼굴도, 그를 가린 인간의 껍질도, 그 인간의 껍질을 치장하기 위해 꾸며낸 가면조차도 제이에게 있어서는 불가해였다. 그가 이 세상의 어떤 존재보다도 눈 앞의 악마를 잘 알고 있음에도 그랬다.
가면의 뒤편이 궁금하던 시절도 있었다. 아니, 당장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를 대면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자 그를 해석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메피스토는 손에 잡혀 줄 것처럼 굴었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배분하는 환상임을 아는데도 제이는 잠시 그것에 홀리고 말았다.
꿈에서 깨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제이는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사랑이 아님을 알았다. 적어도 그렇게 명명하고 나니 냉정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갈라진 혀끝을 빼물고 설탕 막대를 녹이는 맞은편의 남자가 매력적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제이는 잠시 솔직해지기로 했다. 아마 홍차의 카페인 때문일 것이다.
“형제분들도 이런가요?”
메피스토는 보란 듯 의외란 표정을 짓는다.
제이는 신중한 사람이었다.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을 지나치게 많이 알아 버린 사람이 으레 그렇듯 말을 극도로 아꼈으며 행동거지도 조심스러웠다. 메피스토의 집-이세계의 미로 같은 그곳-을 돌아다닐 때에는 올빼미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녀 그를 웃게 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그런데 웬일로 그의 형제들이라는 예민한 주제를 입에 올리는 것일까.
“형제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경향성에 대해 논하고 싶은 겁니까? 악성이나 파괴욕 따위에 대해서요?”
“아뇨.”
고개를 저은 제이가 설탕 막대를 집어든다. 메피스토를 따라 그것을 찻물 속에 집어넣고 살살 흔들며 말을 잇는다.
“육신이 가진 매력과 인력에 대해 묻고 싶었어요.”
그의 목소리는 아주 담담하고 차분하다. 조금이라도 부드러운 기색이 있었더라면 반했느냐고 너스레를 떨 수 있었을 것을, 논문이라도 읽는 듯 한 어조였다. 메피스토는 장단을 맞추어 주기로 한다.
“오. 글쎄요. 워낙에 표본이 적기에 신뢰성 있는 대답이 될는지 모르겠으나, 어느 정도는 필연적이랍니다. 우리의 속성을 생각해 보세요. 인간들이 그들의 예술 속에서 우리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도요.”
제이는 납득한 듯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이제는 설탕물에 가까워진 홍차로 입술을 축인다. 메피스토는 두 번째 설탕 막대를 잔에 넣고 휘젓기 시작했다. 그는 들으라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의 눈에도 내가 매력적으로 보입니까? 이것 참 의외로군요. 심미안 따위는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요.”
대화 속에 조롱과 냉소를 집어넣는 것은 메피스토의 특기였고, 제이는 그 특기가 통하지 않는 사람 중 하나였다.
“조형과 배치에 대한 객관적인 감상 정도라면 얼마든지 내놓을 수 있어요.”
“잘 생겼다는 칭찬을 이렇게 재미없게 듣기는 처음이네요.”
설탕이 하얗게 가라앉은 차를 단번에 들이켠 메피스토는 설탕 막대를 오독오독 씹는다. 제이는 아직 반도 줄지 않은 홍차가 담긴 잔을 양 손으로 감싼 채 잠시 침묵했다. 고개를 돌리면 창 밖으로 학원 도시의 전경이 펼쳐져 있었다. 아주 작고 조밀한 광경. 메피스토는 매일같이 이 창을 통하여 도시를 내려다볼 것이다.
인간이 개미처럼 작게 보였다.
메피스토 펠레스에게는 실제로도 그와 다를 바 없으리라.
제이는 문득 생각했다. 그에게 과연 어떤 것이 의미가 있을까? 백 년도 살지 못할 미물은 감히 영원의 삶을 헤아리려 시도한다. 메피스토는 수많은 이름으로 이 세상을 떠돌았을 것이고 또 수많은 인간들이 그를 스쳐 떠나갔을 것인데, 강물 같은 시간 속에서 시간의 왕은 무슨 생각을 할까.
그의 아버지 되는 이가 이 세상을 뒤흔들 것이라지만 지난 천 년 간 이런 일이 또 없었을까. 모든 일이 다 지나가고도 그는 영원할 것이다. 제이는 그에게 영원히 기억되는 것 따위는 전혀 바라지 않았다.
그러니 궁금한 것이다. 그는 자신을 언제쯤 잊을까.
“오백사십팔 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세요?”
“기억하고말고요. 그때의 저는 중앙아시아를 떠돌고 있었답니다. 15세기의 역사가 궁금해지기라도 한 건가요?”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그렇다면?”
“비밀로 할래요.”
메피스토는 다크서클이 짙게 드리운 눈을 깜빡였다. 그는 오늘이 참으로 의외로운 날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올빼미 같은 인간에게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이 또한 드문 일이었다. 메피스토는 대체로, 아니. 십중팔구는 인간의 속을 빤히 들여다볼 수 있었기에 그랬다. 그의 막냇동생처럼 멍청하지 않더라도, 손꼽히는 석학이라도, 세계의 진리를 통달했다고 자부하는 현자라도 그의 앞에서는 마찬가지였다. 메피스토는 어린아이의 손목을 비트는 것보다도 쉽게 그들로부터 진실을 갈취했다. 그들은 메피스토가 가진 지혜에, 불멸성에, 마성에 열광하며 자신들을 바쳤다. 터무니없이 쉬웠다.
그러나 이 인간은 어떠하지. 제이는 시작부터 그에게 있어서 난제였다. 그는 예비된 미래와 심처에 숨겨진 비밀들을 안 채로 메피스토에게 왔다. 예언서를 읽은 것처럼 굴면서도 그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그리고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생존과 관망 외에는 바라는 것이 없었다.
그것은 메피스토 펠레스에게 있어서는 꽤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그는 충동적으로 의자를 박차고 일어선다. 두 걸음을 다가가 제이가 앉은 의자의 팔걸이를 양 손으로 짚고 허리를 숙였다. 제이의 마른 몸 위로 긴 그림자가 덮인다. 줄곧 햇볕을 쬐고 있었기에 그 그림자는 아주 차갑게 느껴졌다.
“당신은 이미 비밀이 많은데요, 제이.”
메피스토는 원한다면 얼마든 잔혹해질 수 있었고 또 그만큼 다정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둘 중 어느 가면도 쓰지 않기로 했다. 사마엘의 무표정에는 엷은 피로가 깃들어 있다.
내려다보면, 제이는 여전히 양 손으로 식어빠진 찻잔을 쥐고 가만히 그와 눈을 맞춘다. 안경알 너머 무색무취의 눈동자.
“저는 이사장님께 제 가장 큰 비밀을 말했는데도요.”
짧지 않은 침묵. 그들은 눈을 맞춘 채 말이 없다. 메피스토는 이 작은 인간을 죽여 미지를 해소할까를 잠깐 고민했으나, 이내 그만두기로 정했다.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를 없애 버린다면 영원한 미지가 남을 뿐임을 그는 이미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손바닥을 뒤집듯 태도를 바꾼다. 산뜻하게 상체를 일으키고 손가락을 딱 소리가 나게 튕겨 티 테이블을 통째로 치워 버렸다. 제이가 손에 쥐고 있던 찻잔만이 남았다. 불쾌할 정도로 들큼해진, 미지근한 차가 담긴, 푸른 꽃이 그려진 살구색의 찻잔.
“가져요. 이백 년 전 어느 왕가의 공주가 쓰던 물건이랍니다. 마음대로 쓰기는커녕 모시고 살 미래가 보이지만요.”
“아뇨.”
메피스토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등을 향해 제이가 찻잔을 내밀었다. 예의 떨떠름하고 무언가 걸리는 듯한 낯을 한 채,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선물을 거절한다.
“정말로 모시고 살아야 할 것 같으니 가져가세요.”
그 순간 등을 돌린 채 선 메피스토는 불한당 같은 웃음을 머금고야 만다. 한 방 먹었다. 적어도 그의 입장에서는 그랬다. 자존심이 몹시 상한 악마가 다시 손가락을 딱 소리가 나게 튕기자 제이의 손에 있던 찻잔은 설탕 막대 하나로 바뀌어 있다. 제이는 그것마저 거절하지는 않았다. 메피스토가 빙글 돌아서자 설탕 막대를 문 채 덩그러니 앉은 인간이 그를 바라보았다.
언젠가 제이가 시간을 멈춰 달라며 애원할 날이 온다면 메피스토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본인조차도 짐작할 수 없는, 이루어질지조차도 불확실한 그 미래에 대해 가늠하며 메피스토는 눈을 찡긋해 보였다. 제이는 그 눈짓에 한숨을 삼킬 뿐 말이 없다.
“다음에는 일본식 찻자리를 가지죠. 다도에 대해 공부해 오도록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