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을 둘러싼 방청객들의 분칠한 얼굴들은, 주홍빛 조명 아래서 거의 석고 조각상만큼이나 생기 없이 보였다. 같은 촛불 아래라 해도 무도회장의 샹들리에와 법정의 촛대는 이 얼마나 다른지! 오를레앙 공작, 필립 에갈리테는 터무니없도록 팔자 좋은 생각을 한다. 웃음을 참기 위해 긴 숨을 내쉬어야 했다. 위압감을 조성하도록 높이 배치된 재판장의 의석에서 마찬가지로 석고 같은 얼굴들이 그를 내려다보는 와중이었다.
“루이 필리프 조제프. 전 오를레앙 공작이 맞나.”
“예.”
“신성한 법정에서 성실히 답변하라.”
“그리하겠소.”
전 오를레앙 공작은 자동인형처럼 매끄럽게 읊었다. 그는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한 귀족식 악센트의 프랑스어를 구사했는데, 그 말씨만으로도 어렴풋이 화사한 베르사유의 정원이 그려질 정도였다. 부와 평온의 향기가 배어나오는 우아한 악센트는 장소와 겉돌아 이질적이다. 고작 짧은 대답 두 음절만으로도 방청객들 사이에서 나직한 소요가 일었다.
재판장은 가장 높은 자리에서 일련의 소란을 내려다보며 내심으로 혀를 찼다. 저 남자가 비록 죄인의 신분으로 전락해 재판정에 서 있다 한들 오를레앙 공작이 가졌던 장악력과 위엄마저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니었다. 이 재판, 어쩌면 길고 번거로워질 수 있겠군…. 그런 예감이 스쳐지난다. 오를레앙 공작은 달변가였고 정치꾼이며 막후의 지휘자였다. 그는 원한다면 어떠한 정치적이고 법적인 싸움이든 제멋대로 휘젓고 뒤흔들 수 있는 남자이다.
그러나…. 지금 저기에 서 있는 남자는 어떠한가? 필립 에갈리테라는 단출한 이름으로 불리운 저 남자는, 여전히 도도하고 오만하며 귀족적인 낯이되 아직까지는 재판장의 염려를 비웃듯 조용하기 그지없다. 재판장은 그 까닭으로 도리어 긴장하고 만다.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오를레앙 공작? 또 어떠한 기지와 칼날 같은 혀끝으로 우리의 정의와 싸울 것이냐?
재판장이 투지와 열의를 불태우며 말을 고르는 사이, 들불처럼 일어났던 짧은 웅성임은 금세 잦아들었다. ‘그’ 오를레앙 공작의 몰락을 지켜보기 위해 모인 시민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점차 침묵에 젖어들었다. 그들의 열띤 시선이 재판정에 선 이에게 모여들었다. 마치 무대에 선 배우에게 기대에 찬 눈길을 던지는 관객들과 같았다.
오를레앙 공, 필립 에갈리테는 그것을 느꼈다. 다시금 웃음을 참기 위한 의도적인 심호흡. 그는 일평생 정치와 협잡에 몸담으며 산 덕에 등 뒤로 쏟아지는 군중의 시선 따위는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정치꾼의 인생이란 궁정의 광대 혹은 오페라 극장의 에투왈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불현 듯 스쳐지나갔다. 손끝으로 사람을 부리고 턱짓으로 목숨을 거둘 수 있는 위치에 오른다 한들, 자신들이 부리고 죽이는 민중에게 버림받으면 이토록 보잘 것 없어지는 것이 군림자의 운명이다. 이 어찌나 얄궂은가.
높은 곳에 앉은 검사가 한 질의 문서를 들어올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필립 에갈리테는 휘갈겨쓴 자신의 서명을 확인하고는 알만하다는 낯을 했다.
“이것을 보시오! 이것은 오를레앙 공작, 즉 필립 에갈리테와 자크 에베르 사이에 오간 계약서요. 내 여기에 적힌 일련의 내용을 읽어 드리리다.”
검사는 즉시 목소리를 높여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필립 에갈리테는 그 음성이 방백하는 배우와 같다고 생각한다. 종이 위에 은밀하게 쓰였던 모략들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국왕, 왕비, 낯뜨거운 스캔들과 노골적인 비난들, 보석상, 목걸이, 사치스러운 이국 출신의 마리 앙투아네트…. 무엇 하나 충격적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잠시간 침묵을 유지하던 방청객석이 벌통을 들쑤신것마냥 소란스러워졌다. 터져나오던 탄성은 혼란스럽게 의견을 나누는 나직한 목소리들로 이어지고, 마침내 거친 비난으로 귀결되었다.
필립 에갈리테는 이 순간, 내심 군중의 속성은 흐르는 물이나 공포에 질린 양떼와 같다고 여겼던 한때의 생각을 복기한다. 그들은 한 방향으로 향하며 관성이 붙으면 멈출 줄을 모른다. 그렇기에 한 개인보다 수십 수백의 군중은 몰아쳐 선동하기가 쉬운 것이다. 보라, 지금 또한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등 뒤로 쏟아지는 욕설과 폭언이 이를 증명한다. 숫제 폭동이라도 일으킬 듯 날뛰는 시민들로 인해 검사는 거의 악을 써야 할 지경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 재판은 필립 에갈리테의 정치적 생명뿐 아니라 생사여부를 건 일생일대의 싸움이었다. 그는 구명을 위해 마땅히 재판에 힘써 스스로를 변호해야 한다. 필시 그래야 할진데….
“이 계약서에 서명한 것이 당신이 맞소?”
“내 이름이 내 글씨로 쓰여 있군. 달리 확인이 필요하오?”
이리 선뜻 인정하게 되는 것은 어째서란 말인가. 오르지 못할 자리를 바라보며 목을 매단 끝에 찾아온 것이 광증이란 말인가?
“혁명을 지원하고 시민의 편을 자처하던 것이 모두 거짓이고, 실제로는 왕과 왕비를 죽여 그 자리에 앉으려던 계획이었음을 모두 시인한단 말인가?”
필립 에갈리테, 대답해 보라. 나는 정녕 미쳐버려 내 목숨을 내어다 버리는 중인가?
한때 오를레앙 공작이라 불리던 남자는 지친 듯 고개를 끄덕인다.
재판장을 비롯한 법관들이 모두 아연해져 입을 다물고, 여전히 시민들의 외침은 파도처럼 거세게 몰아치는데.
오를레앙 공작은 그 비상한 두뇌만큼이나 생각이 많은 인물이었다. 그는 권력을 향한 욕망이 자신을 불처럼 사를 때에도 권력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에, 일찍이 자신의 숙원이 실제로는 어쩌면 더없이 허무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세워 두었다.
자신의 모든 암투와 계략이 바위를 굴려 올리는 시시포스와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스스로 떠올렸음에도 모욕적인 생각인지라 금세 잊고자 마음먹어 잊어버리고 말았으나. 권력을 잃고 추락해 떨어진 이 재판장에서는 그를 떠올리지 않기도 힘든 노릇이었다.
필립 에갈리테는 이 순간 극적으로 긍정했다.
그는 기어올랐으니 이제 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몰락의 순간 어린양처럼 죽어 나자빠지는 것 또한 오를레앙 공작의 취향은 아닌지라, 그는 마지막으로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의 귓속에 한가지 독을 불어넣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대들도 참으로 뻔뻔한 노릇 아닌가.”
이야말로 참으로 배우와 같은 태도였다. 필립 에갈리테는 보란 듯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재판장을 위시로 해 모인 이들 모두가 울컥 성을 낼 정도로 오만한 태도였으나 동시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그는 몸을 돌려 방청객을 바라보며 섰다.
“나는 내 앞에 들이밀어진 이 죄목을 모두 인정하겠소. 그러나, 그렇다면, 그대들의 혁명이 오를레앙 공작의 금고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그대들 또한 인정해야 하지 않겠소?”
누군가가 헛소리! 하고 날카롭게 외쳤으나 필립 에갈리테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귀족의 전형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무표정하고 우아해 마치 대리석을 조각해 만든 가면 같았다. 살을 찢는다면 분명 푸른 피가 흐르리라 생각될 정도였다. 입술은 멈추지 않는다.
“혁명의 속성은 파괴이고, 그것이 마치 사트루누스와 같아 자신의 자식을 잡아먹는다지만 나는 반대로 생각하오. 이 혁명은 제 자식이 아닌 저를 낳은 아비를 잡아먹고 있지 않소?”
필립 에갈리테는 오연히 서서 아우성치는 얼굴들을 바라본다. 눈 앞에 바다처럼 분노가 출렁이고 있었으나 그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깟 감정보다 더한 원한을, 그는 짓밟고 내던지며 기어올라왔다.
“제 자식을 잡아먹은 사트루누스는 곧 자식에게 패배해 물러났다지. 내가 마침 그러한 꼴이로군.”
“닥치시오!”
마침내 견디지 못하고 낮은 웃음을 터뜨리며, 필립 에갈리테는 이전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쾌락을 느낀다. 그것은 성취가 아닌 파괴로부터 비롯되는 즐거움, 즉 저열하고 질 낮은 감각이다. 그러나 상관없는 일이다, 이토록 영락해버린 그에게 있어서는….
재판장이 소리치다시피 방청객들을 진정시키고 분노에 득 찬 목소리로 그에게 사형을 언도하는 내도록 필립 에갈리테는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어쩌면 이리도 즐거울 수 있단 말인가. 모든 망가진 것들의 밑바닥에서는 이러한 감각들이 반짝이는가.
필립 에갈리테는 죽을 것이다. 한때 오를레앙 공작이었던 그 남자는 모든 영광을 잃고 또 잃은 끝에, 그의 정적들이 그러했듯 단두대에 무릎꿇고 목이 잘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이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전 오를레앙 공작이 거칠게 끌려나가며 생각하기를.
이것이야말로 참된 자유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