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선과 나선
딱복2025-04-25 00:15

밤의 장막은 무지와 무치의 베일. 가장 용맹한 장군의 칼을 꺾고 가장 지혜로운 현자의 냉정을 끓게 한다. 

두 남자의 토가는 어둠 속에 서로 얽혀 있었다.

 

가이우스는 이레니우스의 가슴에 기댄 채 말이 없다. 그에게 있어서는 아주 오래간만의 평온한 침묵이었다. 전장에는 혼란한 소음과 폭발할 듯 팽창한 정적 외에는 없었기에, 가이우스로서는 이 평화 속에 가급적 오래도록 잠겨 있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는 손을 들어 이레니우스의 마른 뺨을 매만진다. 손에 닿는 부드러운 살결. 가이우스는 이러한 순간마다 이레니우스를 둘러싼 문명이라는 성벽이 참으로 견고함을 실감하고는 했다. 장군 가이우스가 근 석달동안 만진 물건 중 가장 부드러웠던 것은 무두질한 가죽 고삐였고, 그것은 오래 쥐면 굳은살 박힌 살갗이 벗겨지도록 단단했다. 그러나 이레니우스가 근 석달간 쥔 가장 거친 것은 백조의 깃으로 만든 펜이었을 터다. 그들에게는 꼭 그만큼의 먼 거리가 있었다.

연인의 손이 가이우스의 짧게 자른 머리칼을 쓸고 지난다. 감출 수 없는 그리움과 씁쓰레한 애상이 묻어 있는 손짓이었다. 그들은 한 계절이 바뀔동안 떨어져 지냈고, 긴 그리움을 거쳐 지난 낮에 재회한 참이었다. 기쁨이 해와 함께 저물고 밤이 되자 부풀었던 마음만큼의 슬픔이 밀려들어왔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들은 인생의 절반이 훌쩍 넘는 기간동안 서로를 사랑했고 열렬한 애정만큼이나 깊은 이해가 거기에 있었다. 

이레니우스가 실낱처럼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또한 이 고요함을 깨트리기가 꺼려지는 탓이었다.

“내일 오전에는 함께 정원을 산책하지. 자네가 없던 동안 꽃이 많이 피었어.”

가이우스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답이 긍정임을 둘 모두 알았다. 그들은 서로의 품에 기대어 잠들었다. 꿈도 꾸지 않는 깊은 잠이었다.

 

이레니우스는 그의 도무스 앞뜰은 유행보다는 오래된 격식과 자연스러움을 기조로 해 꾸며 놓았다. 공작을 비롯한 관상조를 풀어놓고 과실수와 정원수를 흐드러지게 조성해 놓은 정원은 늦봄인 지금 절정의 아름다움을 뽐냈다. 연인은 어깨가 닿을 거리에서 정원을 걸었다. 노예를 모두 물려 놓았기에 그들의 밀회를 방해할 이가 없었다. 이레니우스는 나무 그림자 아래에서 애인의 손을 잡았다. 가이우스의 단단한 손이 그를 맞잡아온다. 그들은 그늘 오직 그늘 아래에서만 서로에 대한 열애를 드러낼 수 있었다. 

두 연인은 해가 반 뼘 넘게 움직이도록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 필요한 은밀한 애정의 말들은 서른을 넘길 즘에 이미 전부 나누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지금에 이르러서는 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아닌 해야 할 말들이 생겼음을 서로가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사랑은 별이 아닌 햇살이나 공기 같은 것이 되었다. 막연히 올려다보며 손 안에서 조심히 머금어야 하는 속성의 감정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이 사랑 아닌 것이 되는 것은 아닌지라, 가이우스는 어쩔 도리가 없이 이레니우스가 사랑스러웠다. 나뭇잎 사이로 쏟아져내리는 햇살 아래 절묘한 그림자가 지는 그의 옆얼굴과, 그를 돌아볼 때에 빛이 들이쳐 환하게 빛나는 눈동자. 가이우스는 이레니우스가 자신을 바라보는 모든 순간들마다, 자신은 이 얼굴을 아주 오랫동안 그리워한것만 같다는 착각에 휩싸이곤 했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멈춰서서 길게 시선을 나누었다. 이레니우스는 맑은 못을 들여다보듯 가이우스의 눈을 바라보며, 연인의 얼굴을 바라볼 적에 필연적으로 슬픔이 동반된 것은 어느 순간부터인가를 생각한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소년 시절의 무모한 애정이 때때로 그리워졌다.

그러나, 회상하노라면. 가이우스는 철모르던 젊은이 시절 누군가와 싸움이 붙었을 때에도 불타오르듯 이글대는 눈을 했더랬다. 마치 이레니우스에게 황제의 위대함과 전쟁의 쓸모를 설파할 때와 꼭 같이. 그러한 순간마다 이레니우스는 인간의 천성 혹은 운명에 대하여 슬퍼했다.

이레니우스는 눈을 감는다. 눈꺼풀에 비치는 햇살. 그대로 가이우스에게 입을 맞추었다. 도무스에는 나무가 무성하고 수많은 그림자가 드리우기에 그들은 두려움 없이 입술을 포갤 수 있었다.

“자네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지.”

연인의 온기가 남은 입술로 이레니우스가 가장 먼저 뱉은 말은 이것이었다. 서로의 인생에 있어 첫째가는 이해자가 다름아닌 서로임에도 그러했다. 가이우스는 부드러운 낯을 하고 대답한다.

“자네 또한 그럴 것을 알아.”

가이우스와 이레니우스는 부정할 수 없이 일생의 연인이다. 그러나 완벽하게 들어맞는 돌쩌귀가 서로 다른 모양을 하고 있듯, 그들은 상대를 온전하게 좋아할 수 없었다. 두 연인이 열 살만 젊었더라면 이 자리에서 한바탕 논쟁을 벌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들이 조금 더 혈기가 넘치던 시절에는 손을 잡고 정원을 거닐다가 낯을 붉히며 서로를 비난하기가 일쑤였다. 가이우스는 강력한 황권이 이끄는, 완벽하게 평화로운 로마를 원한다. 그러나 이레니우스는 그것에 넌더리를 내며 공화정이야말로 올바른 정치의 형태임을 주장했다. 그들은 몇 번이고 화를 내고 애원하며 상대를 설득시키려 애썼고, 지금까지도 그 시도를 그만두지 않았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지친 적도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럼에도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기적 같은 일이다.

이것만큼은 둘 모두 동의하는 바였다.

지금 순간 또한 그렇다. 둘은 이 자리에서 당장 말다툼을 시작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언젠가 와야만 할 비극을 외면하는 심정과 다를 바 없으나,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이 평온에 유예를 두고 싶은 마음이 컸다. 

도무스의 앞뜰이 넓다 해도 비좁은 로마 시내의 정원이 얼마나 넓고 울창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단둘이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리고 싶은 마음에 정원을 빙빙 돌다가 눈이 마주쳐 웃어 버리고 말았다. 저녁을 함께하자 약속하며 잠시 쉬기로 하였다.

 

오후의 햇살에 달구어졌던 마음은 아주 느리게 가라앉았고, 가이우스는 감정의 여운이 달큼하게 흩어지는 것을 느낀다. 함께하는 시간이 꿈처럼 행복한만큼, 그 이후의 일들을 상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쟁과 종전, 그들이 황제의 연회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서로를 상처입혀야만 하는 시간들. 저녁식사를 앞두고 채비하는 내내 가이우스는 황제의 영광된 권력과 연인에 대하여 생각했다. 이레니우스를 다시 만난 무렵에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었다. 이레니우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함께할 때에 종종 서로를 상처입혔으나, 함께하지 않는 순간에 더욱 괴로웠다.

식사 자리는 팽팽하게 당겨진 가죽 북처럼 미묘한 긴장감이 함께했다. 이레니우스는 매를 청하는 심정으로 운을 떼었다.

“자네와 종일 함께 지내니 정말 좋군. 자네의 군 생활이 끝난다면 앞으로 계속 이리 지낼 수 있을텐데 말이야.”

가이우스는 잠시 침묵한 후에 대답한다.

“황제의 명을 따르는 것은 신하의 영광된 도리네.”

“… 내가 무어라 대답할지 알고 있음에도 그리 말하는군.”

“그건 자네 또한 마찬가지야.”

그들은 거의 동시에 얕고 긴 숨을 내쉬었다. 이것은 오래 반복되어 온 화제였다. 언제나 이런 방식으로 시작해 긴 한숨으로 끝나는 지난한 과정의 연속이었다. 몇 마디의 말이 더 오갔다. 제정의 위험성과 공화정의 필요성, 유일한 권력의 통치 아래에서만 이룩될 수 있는 완전한 평화, 죽음과 피, 전쟁. 그러나 모든 이야기들은 더없이 초라하고 개인적인 결말로 갈음되고 만다.

“알잖나. … 나는 자네가 다치는 것이 두려워.”

항상 그래왔어. 그 순간 가이우스의 머릿속에 별이 반짝이듯 떠오른 기억은, 소년 적 이레니우스가 소리없이 눈물짓던 얼굴에 대한 것이었다. 언제인지조차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그 옛날. 이레니우스는 가이우스에게 지금과 똑 같은 말을 하며 울었다. 그때의 자신은 무어라고 대답했던가.

“… 내가 네게 황제 아래 가장 영광된 자리를 주고 싶어 그래.”

이레니우스는 포도주 잔을 기울이다 말고 눈을 내리깔며 웃고야 말았다.

“이런 고집불통.”

만만찮은 고집불통이 그리 말한다. 제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해야 한다 열변을 토한 이에게 저것이 과연 할 말이던가? 그러나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물이 차오르듯 간질거리는 이 감각은 과연 무엇일까. 이 감정을 사랑이 아니면 과연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연인과의 언쟁은 언제나 그렇듯 지독한 피로를 남기고 끝이 났다. 마지막을 웃음으로 장식했다 해도 그렇다. 어쩌면 두 사람이 나이를 먹었기에 더한 피로를 느끼는 것일수도 있으리라. 가이우스는 그 말을 농담으로 던졌다가 이레니우스에게 핀잔을 들었다. 그러나 함께 나이들어 가는 것이 근사한 일이라는 말만큼은 이레니우스도 부정하지 않았다.

둘은 오늘도 함께 잠들기로 했다. 한 청년의 인생만큼을 연인으로 지내왔음에도 이리 애틋한 것은 떨어져 보낸 시간이 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가이우스는 그 말만큼은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한 침상에 누워 서로 몸을 포갠 둘은 또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회청색의 하늘에는 구름이 자욱하고 도무스의 채색 지붕은 두터우니, 아무도 그들을 바라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연인은 신들의 눈을 피하겠다는 핑계로 서로의 팔 안에 숨었다.

밤의 장막은 무지와 무치의 베일. 은밀히 사랑하는 이들을 세상으로부터 가리고 그들이 짊어져야 할 의무를 잊게 한다. 그들이 결코 도망칠 수 없고 또한 도망치기를 원치 않는 굴레를 메었음에도. 오늘만큼은. 이 밤만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