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에 대한 단상
딱복2025-04-25 00:18

저 천상에 위대한 신들이 실존함을 알면서도 인간들은 신을 기만하고 이용하려 애쓴다. 밤하늘 위 별자리로 남겨진 조상들이 주는 매서운 교훈에도 불구하고.

그 부나방과도 같은 용맹과 추한 이기심이야말로 인간의 본능인 것인가? 그렇다면 누가 우리를 그렇게 빚어 만들었단 말인가.

 

여기에 수논토스의 왕이 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을 충실히 따라 용맹하고 이기적인 인간이었고, 스스로의 뜻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폴리스를 가호하던 신을 버리고 새로운 신을 섬기기로 마음먹었다. 공물과 신앙을 잃을 위기에 처한 신은 분노했고, 옛 신에게 믿음을 바치던 인간들 또한 분노했다. 폴리스는 반으로 분열되었다. 

그 과정에서 수논토스의 왕은 어쩔 수 없이 사제들과 나누어야 했던 권력을 전부 움켜쥘 수 있게 되었다. 왕은 흡족하게 권력의 향기를 흠향했고, 사제들은 치를 떨며 왕을 맹렬하게 비난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싸움은 곧 신들의 싸움이 되었다. 어쩌면 반대일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수논토스를 둘러싼 평야에서 전쟁이 벌어지리라는 사실 뿐.

그러나 진정으로 옛 신이 분노하고 새 신이 기뻐했던가? 우리의 목전에 놓인 전쟁이 신들의 뜻으로 인함인가? 우리 인간들은 알 수 없다.

 

젊은 청년이 붉은 고수머리를 거칠게 날리며 대신전의 복도를 걷는다. 신전 안은 공사가 한창이었다. 벽과 기둥에 조각된 옛 신의 상징물을 전부 새 신의 것으로 바꾸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사제들은 일제히 반발했으나 폴리스 안을 완전히 지배한 왕의 권위를 막을 수는 없었다. 넓은 신전 내부가 온통 소란스러웠음에도 붉은 머리의 청년은 정면을 쏘아보며 걸을 뿐 눈을 돌리지 않았다. 눈을 돌릴 수 없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하리라.

청년, 로저는 침착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왕의 의지와 신의 뜻, 어지럽게 얽힌 인물들간의 알력다툼, 그가 얻을 수 있는 명예와 잃게 될 명예 따위가 로저의 영민한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면 이토록 혼란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폭풍의 중심에는 단 한 마디가 있다.

“그렇다면 이만 떠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줄리어스는, 이 한 마디로 로저를 떠나보냈다. 그가 검을 쓰던 방식과 똑같이 간결하고 망설임 없는 방식이었다.

그 말 속에 숨겨진 배려와 애정을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는가? 로저는 줄리어스를 잘 알았다. 그와 함께한 수 년의 시간 이상으로 그를 알았다. 줄리어스가 그를 진정으로 아낀다는 것도, 어쩌면 로저를 가족과도 같이 여기고 있다는 사실도, 그가 점차 다가오는 전쟁의 암운에서 로저를 보호하고자 하는 것도 알았다. 

대신전의 정문을 벗어나 대로를 가로지르는 로저에게 수많은 인사가 쏟아졌다. 금세 평정을 회복한 그는 웃는 낯으로 인사를 주고받으며 거리를 걸었다. 청년은 마음 속에서 몇 번이고 신전으로 되돌아가, 다른 방식의 이별 혹은 더 좋은 방향을 점쳐 본다. 그러나 상상을 반복할수록 로저는 신전에서 멀어져가고 결심은 공고해진다. 그는 줄리어스의 반대편에 서서 갑옷을 입고 창을 들리라. 스승을 향한 애정보다 더욱 중요한 것들이 그에게는 수없이 많이 있었기에.

 

몇 달이 지나도록 로저는 줄리어스를 만나지 못했다. 폴리스를 감싸고 맴도는 전운은 날이 갈수록 짙어지고, 적법한 전쟁을 통해 도시의 지배권을 가리자는 의견은 점차 힘을 얻어갔다. 로저의 아비와 줄리어스가 그 의논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도시 곳곳의 대장간은 호미와 부엌칼 대신 창과 방패를 벼리기 시작했고 여인과 아이들은 바깥출입을 삼갔다.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당겨 놓은 활줄과 같은 긴장감 속에서 석 달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어느 아침, 로저는 평야의 막사에서 눈을 떠 갑옷을 걸친다.

비로소 전쟁의 날이었다.

두려움은 없었다. 로저는 신의 예언을 받고 태어난 바 신에게 바쳐진 인간이었기에 그러했다. 그는 응당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처럼 이번 전투의 선봉을 자원했다. 막사 밖으로 나가니 저만치 멀리에 적들의 군대가 보였다. 로저는, 그가 보일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을 가늘게 뜨고 적진을 살핀다. 거의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지난 수년간 이토록 그와 오래 떨어져 지낸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로저에게 있어 부모와도 같은 사람이었다. 그래서일까? 그의 젊은이답게 혈기 넘치는 심장 한켠에 두려움이 도사는 까닭은. 로저는 맑고 새파란 하늘 아래서 가슴을 편 채로 짧게 생각에 잠긴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신에게 지음받은 몸, 신이 거둔다면 두려울 바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만일 이 전장에서 줄리어스와 조우하게 된다면? 자신이 그의 목숨을 거두는 순간이 온다면.

로저는 자신이 일말의 두려움을 느끼고 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변하는 것은 없다. 해야 한다면 하리라. 줄리어스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리라고 로저는 믿었다.

상념은 뿔피리 소리에 멎는다. 개전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로저는 투구를 뒤집어쓰고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향했다.

 

완벽하게 갖춘 갑옷은 무겁고 투구는 시야를 제한한다. 전시의 군대가 바라보아야 할 방향은 오로지 정면, 그 외의 방향은 불필요하다. 두 진영의 군대는 수레바퀴가 구르듯 서로에게로 들이닥쳐 찌르고 찔리며 죽어갔다. 엄폐물이라 할 것도 없는 평야에서 우회며 매복 따위의 전술은 불가능한 것이라 그들은 가장 단순하고 지독한 방식으로 서로를 죽였다.

이 광경을 하늘 위에서 본다면 퍽도 잔혹하고 가여우리라. 줄리어스는 단창을 휘둘러 적병의 목을 꿰뚫으며 그리 생각했다. 그는 어리지 않았으나 그의 삶 속에서도 이 정도 규모의 전투는 처음이었다. 개미떼처럼 발버둥치는 이 인간들 속에 그 또한 있으리라. 로저. 줄리어스는 입속말로 그의 이름을 불러 본다. 로저를 떠나보낸 것은 줄리어스의 최선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고통이 고통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이 전장에서 로저는 죽게 되리라. 눈먼 칼날에 찔려, 살의를 담은 창날에 꿰뚫려, 어쩌면 줄리어스 자신의 손에.

줄리어스는 결정의 순간이 온다면 망설이지 않고 로저를 죽일 것이다. 그는 자신을 알았다. 그러나 그 때의 자신이 얼마나 슬퍼하게 될까를 생각하노라면 아득하게도 두려워지고야 마는 것이다. 

그의 삶은 여지껏 무색이었으며 건조하고 담담할 뿐이었다. 그러나 로저, 그 아이가 앳된 뺨이 동그래지도록 미소지으며 자신에게로 달려오던 그 순간순간마다 줄리어스는 애정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것은 감히 사랑이라 일컫을 수 있는 색이었다.

그러니 운명이란 어찌 이리도 잔혹한 것이란 말인가. 사랑을 알게 되면 반드시 빼앗기게 되니 삶이란 어찌 이리도 슬픈 것이란 말인가.

 

아침안개가 걷힐 무렵 시작되었던 전투는 이른 오후가 되도록 이어졌다. 전쟁에는 광적인 마력이 있기에 인간들은 지치는 줄도 모르고 서로의 살을 가르고 뼈를 쪼갠다. 폴리스의 모든 장정이 다 쏟아져나온 까닭으로, 사람이 많이 죽었으나 성문 앞의 평야는 혼란스러웠다. 줄리어스는 반 광란 상태가 되어 무아지경으로 칼을 휘둘렀다. 문명이라던가 이지 따위를 잊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눈 앞으로 바람을 가르며 날아드는 칼날이 있어 반사적으로 막아서고 고개를 드니, 아! 로저.

투구 아래로 면갑을 써 눈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으나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여름날의 설익은 과실 같은 그 눈동자. 그가 지난 수년간 매일같이 바라보던 그 눈빛을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서로를 알아봄과 동시에 상대방 또한 자신을 알아보았음을 인식했다. 사고가 아닌 감각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입을 여는 이도, 검로에 망설임을 두는 이도 없었다. 그들은 서로를 죽이기로 마음먹은 사람처럼 검을 휘둘렀다. 날카롭게 벼린 칼날이 맞붙은 순간마다 유성처럼 불티가 튀었다. 몇 합의 공방이 오갔으나 그들은 서로를 상처입히지 못했다. 그들은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둘의 싸움이 어찌나 맹렬했던지, 질서 따위는 없이 혼란스럽던 전장 한가운데에 작은 원형의 공간이 생겨났다. 줄리어스가 검을 추스르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나자 로저 또한 뒷걸음질쳐 거리를 벌린다. 그들은 면갑조차도 거두지 않은 채 석달만의 대화를 시작했다.

“스승님.”

로저는 불가항력적인 기분을 느끼며 입술을 뗀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조차 모르면서도, 무언가 말하지 않으면 안될 것만 같아 그랬다.

“오래간만이다.”

철을 두들겨 편 후 무늬를 세공한 검은 면갑 아래서, 숨조차 헐떡이지 않은 듯 침착한 목소리가 돌아온다. 로저는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가 궁금해졌다. 그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자신해 왔으나 이 순간만큼은 아니었다. 이 짧은 대담의 순간이 지나가면 그들은 다시 검을 들고 맞붙어야 할 것인데, 그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변하는 것은 없음에도 알고 싶었다.

“변함이 없으십니다.”

“고작 석 달 동안 무엇이 변하겠나.”

두 남자의 목소리는 평온하고 담담해, 생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쥐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로저는 자신이 줄리어스를 눈앞에 두고도 고통스럽거나 망설임을 느끼고 있지 않음에 안도한다.

“이러한 순간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아직은 소년다운 짧은 투정. 그러나 동시에, 두 남자는 검을 추스르며 자세를 바로잡고 있었다.

“네가 얻은 것과 얻을 것만을 생각해라.”

그들이 생각하는 방식이 이토록 닮아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전투의 고양감으로 인함일까, 로저는 미소짓고야 만다.

“줄리어스여.”

날카로운 햇살 아래 피 묻은 검이 번뜩인다. 청년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나는 오늘 당신을 죽이겠습니다.”

줄리어스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비튼다. 로저는 그의 걸작이었다. 그는 긴 시간을 거쳐 한 소년을 청년으로 벼려내었고, 그 청년은 이제 자신의 적수로 눈 앞에 섰다.

줄리어스라는 한 인간에게 로저라는 한 인간은 유일했다. 그는 아들이며 형제였고 친구였으며 그 모든 것을 아울러 가족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전차의 바퀴처럼 무자비하고, 신들의 손끝은 인간의 삶을 제멋대로 휘젓고는 떠나간다. 그들은 신의 손 안에서 만났으니 신의 손 안에서 서로를 죽여야 하리라.

“검을 들어라.”

두 남자는 다시 땅을 짓치며 달려나가 검을 부딪친다. 면갑 너머 빛으로 새파란 시선이 서로를 꿰뚫었다. 마치 별처럼 타오르는 빛깔로, 쏟아지는 유성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