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키 화이트는 특출난 구석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소박한 성정을 가진 소녀였다. 아장아장 길을 걷노라면 행인들이 뒤를 돌아볼 정도로 예뻤던 유아 시절부터 그랬다. 그는 사람들의 눈을 잡아끄는 별 같은 면을 가졌으나 그럼에도 평온한 일상의 소중함을 잊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의 별 같은 눈이 사람들을 매료시켜 결국 ‘국민 여동생’이 되어 버렸음에도 그는 평범한 면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그 노력은 대체로 성공으로 이어졌다. 유키는 스크린 바깥의 삶을 지켰다. 아직까지는 잘 해 오고 있었다. 그는 모자를 눌러쓰고 친구와 유명한 디저트 카페에 가거나 봄날 공원을 산책하곤 했다. 유키의 일상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가끔씩 스스로의 특출난 구석을 잊는 것은 확실히 문제였다.
유키의 ‘보통의 여자애’답지 않은 면 중 하나는 오빠와의 사이였다. 유키는 오빠인 시몬 화이트와 사이가 아주 좋았다. 어느 정도로 좋냐고 하면, 냉장고에 넣어 둔 푸딩을 오빠가 먹어 버려도 화를 내지 않을 정도였다. 시몬은 유키보다 두 살 연상의 활발한 소년이었는데, 그 또한 보통의 남자애들보다 여동생을 조금 더 아끼는 편이었다. 시몬 또한 냉장고 속 푸딩을 유키가 먹어 버려도 화를 내지 않았다.
시몬은 로얄 소드 아카데미의 농구부에서 주전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유키는 오빠와 사이가 좋은 보통의 여자애답게 오빠의 부 활동에도 관심이 많아, 전부터 꼭 한 번은 그의 경기를 응원하러 가고 싶어 했다. 그런데 때마침 그가 저녁 식사를 하며 친선 경기가 잡혔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유키는 지나가는 말로 경기 일자와 시간을 묻고 그것을 외워 두었다.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와의 친선 농구 경기라고. 좋아, 응원 가야지! 유키는 그 나이대의 소녀답게, 산뜻한 마음으로 결정을 내렸다. 그는 지난 몇 년 간의 ‘평범한 일상 유지’를 성공적으로 해내었다. 이번에도 자신 있었다. 적당히 편안하고 귀여운 옷을 입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쓰면, 언제나 그랬듯 별 일 없이 다녀올 수 있을 것이다. 유키는 그렇게 확신했다.
확신했었는데….
원인을 찾자면, 바람 때문이다. 조심조심, 그러나 동시에 신이 나서 발을 들인 현자의 섬에 그날따라 바람이 많이 분 것이다. 푹 눌러쓴 모자는 챙이 넓은 것이었고, 바람은 야속하게도 유키의 모자를 낚아채 달아나고 말았다. 유키는 애써 태연한 척을 했으나 이목을 끄는 것은 금방이었다.
“저어, 실례합니다. 혹시 유키 화이트… 맞나요?”
“아, 네, 맞아요.”
“어머나! 사인 좀 부탁해도 될까요? 영화 정말 재미있게 봤어요!”
이와 같은 상황이 세 번쯤 반복되자 로열 소드 아카데미로 향하는 대로는 삽시간에 유키의 사인회장이 되고 말았다. 하필 주말인지라 길에 사람이 많아, 유키의 주변으로 둥글게 인파가 몰릴 정도였다. 유키는 쏟아지는 인사에 정신없이 답을 하며 쉴 새 없이 손을 움직였다.
사인회를 위해 별도로 만든 사인은 손이 알아서 움직여 줄 정도로 많이 해 본 것이었다. 예뻐요, 귀여워요, 드라마도 영화도 잘 봤어요, 하는 감사한 인사에도 입술이 스스로 대답을 만들어냈다. 유키는 인파에 둘러싸인 채 방긋방긋 웃는다. 그러나 가슴 한 편이 조금 침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보통의 여자애’가 되는 것은 역시 어렵구나. 조명을 받으며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을 선택한 이상은 어쩔 수 없는 걸까? 유키 화이트는 욕심쟁이인 걸까? 그러나 햇살 좋은 주말에 모자를 쓰지 않고 길거리를 활보하는 삶이 유키에게는 필요했다. 웃는 입꼬리가 무거웠다. 사람이 점점 몰려 곤란하기까지 했다. 유키는 양해를 구하고 사람들을 뚫고 나가기로 결심했다. 그때였다.
“어이, 이것들아. 경기하러 가는데 뭐 하는 짓이야. 길 막지 마.”
어어 하는 소리와 함께 저만치에서 인파가 갈라졌다. 머리를 화려하게 땋은 잘생긴 소년이 사람들을 흩어 놓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져지를 보니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의 농구부인 모양이었다.
“아, 저도 오빠의 농구 경기를 보러 왔거든요, 죄송하지만 길을 비켜주실 수 있을까요? 농구 경기 전에, 오빠를 만나고 싶어서….”
유키가 목소리를 높여 말하자 사람들이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길을 비켜 주었다. 유키는 얼른 사람들을 헤치고 나가, 로열 소드 아카데미를 향하여 걸었다. 몰려 있던 사람들이 흩어지자 머리를 땋은 소년도 별 말 없이 일행에게로 돌아갔다.
유키와 소년들은 약간 떨어진 거리를 유지한 채 같은 방향으로 걷게 되었다. 유키가 붙임성 좋게 웃으며 머리를 땋은 소년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구해 주셔서 감사해요. 유키 화이트라고 해요.”
“쟈밀 바이퍼라고 합니다. 저도 여동생이 있어서, 그 애 생각나서 말씀드린 거라. 감사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도요. 조금 곤란했었거든요. 아, 농구부 분이 맞으시지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경기장까지 가는 길을 알려 주실 수 있나요?”
“저희도 그 쪽으로 가던 길이니 같이 가시죠.”
“네, 감사해요.”
소년, 쟈밀은 농구부 일행들보다 조금 앞선 채 유키를 안내하며 걸었다. 학교가 보기보다 멀리 있지 않아, 오 분도 채 걷지 않아 정문이 보였다. 정문의 기둥 옆에 안절부절 못하며 서 있던 시몬이 펄쩍 뛰며 유키를 불렀다.
“유키!”
“오빠!”
유키는 쟈밀에게 짧은 감사 인사를 남기고 시몬에게로 달려갔다. 시몬이 유키에게 잔소리를 퍼붓는 것이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도 들렸다. 가족을 보러 온 거였구나, 하고 생각한 쟈밀이 몸을 돌리자, 에이스 트라폴라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쟈밀 선배, 유키 화이트랑 아는 사이예요?”
“저 여자애 얘기하는 거야?”
“선배, 모르는구나! 저 사람 배우예요! 유키 화이트! 우리 나라에서는 별로 안 유명하지만.”
“그래? 몰랐어.”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해서 깜짝 놀랐다구요! 실물도 엄청 예쁘다.”
에이스가 무언가 조잘거리는 것을 한 귀로 들어 넘기며, 쟈밀은 유키를 바라본다. 여자애는 제 오빠와 신이 나서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뒤를 돌아본다. 웃으며 쟈밀에게 손을 흔든다. 쟈밀 또한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를 돌려주었다.
‘유키 화이트라고 했나. 배우라고.’
유키가 제 오빠와 함께 사라지고, 쟈밀은 농구부의 부원들과 함께 정문을 넘었다. 그는 양 갈래로 묶은 머리를 팔랑거리며 걷던 뒷모습을 생각한다.
‘그냥 보통의 여자애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