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 소음기를 장착한 권총 특유의 작은 격발음이 울렸다. 블라디미르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으나, 총알이 노린 것은 그가 아니었다. 저편에서 이휘가 왼팔을 부여잡으며 엄폐물 뒤로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총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심장이 서늘하게 식는 감각. 블라디미르는 총알이 날아온 쪽을 향해 무작정 권총 몇 발을 갈기고는 이휘에게로 달려갔다.
“이휘. 괜찮아?”
이휘는 아랫입술을 악물고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상처를 확인하니 상박에 총알이 스쳤을 뿐, 심각한 부상은 아니었다. 안심이 되어야 하는데 도리어 가슴이 욱신거렸다. 이휘는 식은땀이 밴 이마를 손등으로 훔치고 턱짓한다. 후퇴하자는 신호였다. 그들은 자세를 낮춘 채 도시 외곽의 폐건물로부터 빠져나왔다.
고요한 밤이었다.
모스크바의 겨울은 매섭게도 추웠다. 인간에게 호의적인 기후는 아니었으나 상처를 치료하기에는 좋은 날씨였다. 적어도 온도와 습도 때문에 상처가 더디 나을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블라디미르는 손수 이휘의 상처를 소독하고 꿰맨다. 병원에 가기에는 지나치게 수상쩍은 총상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이휘는 담담한 낯으로 제 왼팔에 붕대를 감는 애인을 바라본다.
“왜 그런 표정이에요.”
블라디미르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자신의 얼굴이 엉망인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목소리를 제어하는 것이 어려웠다.
“네가 다쳤잖아, 이휘. 어떻게 표정이 좋을 수 있겠어.”
“경상입니다. 운이 좋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요. 다행이라고 여겨야죠.”
다행, 이라고. 블라디미르는 입속으로 곱씹어 보았다. 그래, 이건 정말로 다행한 일이었다. 달도 없는 깊은 밤중에 어두운 건물 안에서 총기로 전투를 벌인 결과가 고작 이 상처라는 것은, 천운이라 해도 좋은 일이었다. 그것이 블라디미르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블라디.”
이휘는 고개를 숙여 블라디미르와 눈을 맞추려 들었다. 그러나 블라디미르는 고집스럽게도 시선을 내리깐다. 붕대를 감아 고정하는 손길은 멈추지 않는다.
“이러기 위해 당신과 함께 있겠다고 한 게 아니었어.”
그는 충동적으로 내뱉는다. 이휘의 손이 멈칫하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뱉은 말은 거둘 수 없고, 터져나온 회한은 돌이킬 수 없었다.
“네가 너와 상관없는 일들에 말려들고, 너를 희생하고, 다쳐 피를 흘리는… 그런 일들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이휘는 대답하지 않는다. 블라디미르는 고개를 들었다. 형광등이 드리운 안와의 그림자 아래서 이휘의 눈은 짙은 아몬드 색으로 보였다. 그 안에 비치는 블라디미르 룸펜의 얼굴. 처참한 표정을 한, 지친 남자. 그는 떠밀린다. 주워담을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말한다.
“이제 그만하자.”
“무슨 뜻이죠?”
“이 관계를 그만두자고 말하고 있는 거야. 나는 너를 다치게 하고 너의 상처는 나를 괴롭게 만들어. … 이젠 지쳤어.”
“블라디미르.”
“이러기 위해서 너를 사랑했던 게 아냐.”
“볼로댜.”
마침내 붕대는 매듭지어지고, 블라디미르는 손을 거두었다. 그는 몸을 일으킨다.
“이제, 그만하자.”
이휘는 제 아랫입술이 떨리고 있음을 느끼고 의식적으로 그를 꼭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조차 확실하지 않았으나 눈을 돌릴 수는 없었다. 시선을 떼면 저 남자가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그랬다. 블라디미르는 인공적인 실내등의 불빛 아래 못박힌 듯 서 있다. 이별을 고한 것은 자신이면서, 도리어 슬프고도 쓸쓸한 얼굴을 하고. 이휘의 입에서 빚어질 긍정의 선고를 기다리듯이.
“나와 상관없는 일들이 아니에요.”
그러나 이휘의 대답은 이와 같았다. 그는 손끝이 희게 질리도록 주먹을 쥔 채, 목소리를 떨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뭐?”
“당신의 일들. 나와 상관없는 일들이 아니라고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휘. 너는 내 일에 협력해 줄 뿐이었어. 이 모든 건 전부 내 문제야.”
“그래요. 당신 문제. 블라디미르 룸펜, 당신의 문제예요. 그런데 그게 어떻게 내 일이 아니게 될 수 있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모르는 척 하기예요?”
블라디미르 룸펜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이휘에게 여유를 돌려주었다. 그는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움켜쥐고 있던 주먹을 풀고 허리를 세웠다. 왼팔의 통증이 그에게 투지를 주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군요, 블라디미르 룸펜.”
“하지만 이휘.”
“아뇨. 내 얘기 먼저 들어요. 당신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을 완전히 무시했어요.”
“이휘.”
전세가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블라디미르는 어쩔 줄을 몰라하며 이휘의 이름을 부른다.
“내게 당신이 필요할 때 당신은 선뜻 손을 내밀어 주었잖아요. 그런데 왜 내가 당신에게 손을 내미는 건 안 되는 거예요?”
“그, 그게. 그건….”
“나는 당신을 이렇게나 사랑하고 있는데….”
블라디미르는 말을 잊는다. 짧은 침묵. 이휘가 고개를 든다. 그림자 아래 어두운 갈색이던 그의 눈은, 이제는 토파즈처럼 밝고 환하게 보였다. 이휘는 그 명료한 눈으로 블라디미르의 눈을 직시한다.
“당신의 문제는 내 문제나 마찬가지예요.”
블라디미르는 불시의 일격을 얻어맞은 사람처럼 움찔하며 한 걸음을 물러섰다.
이휘는 숨을 들이켜고, 선언한다.
“블라디미르 룸펜. 사랑해요.”
그것은 빛을 창조한 신의 첫 언어와도 같았다. 블라디미르 룸펜의 가슴 속에 웅크린 그림자를 남김없이 불사른다.
“당신도 알고 있죠?”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블라디미르는 입술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열면 울음이 나올 것 같아 그랬다.
그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때에는 이런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이휘가 그에게 이토록 뜨겁고도 밝은 마음을 건네리라는 것을 누가 말해 주었더래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기적 같았다.
블라디미르 룸펜의 기적이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쥐고 당긴다. 그를 소파에 앉히고 눈을 마주한다.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걸, 나도 알아요.”
이휘가 미소짓자, 블라디미르는 눈부심을 느낀다. 고개를 기울여 이휘의 목덜미에 이마를 묻으니 그가 조금 웃었다.
“… 미안해.”
이휘는 다 알면서도 모른 체 대답하는 것이다.
“뭐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