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떠나보내며
딱복2025-06-23 14:32

계절은 겨울의 끝을 가로지른다. 때 이르게 움튼 꽃눈들이 흐린 녹색 안개처럼 나무를 감싸 피어오르고, 공기는 매서운 기색이 가셔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곧 봄이 올 것이다. 

태평양 상공을 유영 중인 이동왕국의 영토에서도 점차 겨울이 걷혀가고 있었다. 바닷바람을 맞아 휘청대는 나뭇가지에 부연 녹색 기운이 어리기 시작한 것이다. 봄은 어디에서나 환영받는 존재였으나, 이동왕국에서는 이야기가 달랐다. 왕국의 거주민들은 봄을 반기면서도 내심으로는 겨울이 하루라도 더 오래 지속되기를 바란다. 그들이 사랑하는 겨울의 아이가 하루라도 더 오래 머물 수 있기를 기원하며.

이베르 로랑은 겨울과 함께 찾아와 머무르다가 겨울과 함께 떠나간다. 이 순례도 이제는 퍽 오래되어 익숙해질 법도 한데, 누구도 이른 봄꽃과 함께하는 작별에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겨울과 함께 돌아올 사람임을 알아도 작별이 작별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었기에.

 

이동왕국의 주민이 된 지 한 해가 채 안 된 노엘은, 겨울과 함께 나타난 남자에게 아직도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베르 로랑이라 불리는 남자는 하늘이 회청색으로 맑고 바람이 싸늘하던 어느 초겨울에 모두의 환영을 받으며 등장했다. 왕국의 국민들 모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 다정하기는 하나 속 모를 사람인 국왕조차도 진심으로 기뻐하며 그를 맞았다.

노엘을 제외한 모두가 그를 알고 그를 사랑하는 듯 보였다. 어쩐지 심통이 나는 기분에, 노엘은 별로 친하지도 않은 엘레우세우스를 붙잡고 그가 누군지를 물어보았었다. 덩치가 크고 말수가 적어 왠지 노엘을 위축되게 하는 그 장군 나리는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사내의 이름은 이베르 로랑이며 국왕의 귀애하는 가신이라 했다. 망할 그라상이 저렇게 좋아 죽을 정도로 아끼는 사람이 어딜 갔다가 이제 온 것이냐고 또 묻자, 이번에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엘레우세우스는 씁쓸하게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때가 되면 알 수 있을 것이라는 말만이 남았다.

뭐야, 불친절하긴!

대답을 피한 것은 엘레우세우스인데, 괜히 이베르 로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두가 좋아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반작용처럼 아니꼬움이 솟아났다. 어쩐지 그를 싫어하게 될 것만 같았다.

 

최악의 –일방적인- 첫인상을 남긴 등장 이후로 이베르와 노엘은 큰 접촉 없이 일주일가량을 보내었다. 이베르는 국왕과 한 몸처럼 붙어 다니며 이동왕국이 그간 얼마나 변했고 국민이 몇이나 늘었는지를 확인하기에 바빴다. 아닌 척 해도 국왕을 좋아하는 노엘이 더욱 화가 났음은 물론이다. 저만치서 이베르의 은발 꽁지머리가 살랑살랑 흔들릴 때면 노엘의 신경줄도 덩달아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노엘은 어른이다. 일방적으로 밉게 여기는 사람에게 시비를 걸고 주먹질을 할 나이는 지나도 한참 지난 것이다. 이대로 접점 없이 지내자. 소 닭 보듯 하는 거야. 노엘은 스스로에게 다짐을 받아내듯 되뇌었다. 안 마주치면 되잖아. 안 마주치면.

인간의 생각에는 이상한 힘이 있어, 그 사람을 좋아해선 안 된다 생각하면 좋아하는 마음은 더 커지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그 사람과 안 마주칠 거야, 하고 생각하면 이상스럽게도 마주칠 일이 생기고 마는 것이다. 때는 이베르가 나타난 지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완연히 겨울에 접어들어 창백해진 푸른 하늘로부터 눈발이 날리는데, 왕궁의 정원에 두 남자가 우뚝 서 있다.

이베르 로랑은 장미 한 송이 없이 쓸쓸한 정원 한 가운데에서 눈송이가 떨어지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사색을 방해하며 등장한 이가 노엘이었다. 국왕과 음악 이야기를 빙자한 바보 같은 설전을 나누다가 정무를 봐야 하니 나가라고 퇴짜를 맞은 참이었다. 성난 발소리에 고개를 돌린 이베르가 약간 놀란 낯으로 인사를 건네었다.

“…안녕하세요, 노엘.”

“…어, 어어.”

노엘은 그가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아는지 의아해졌고, 이베르는 조금 떨어진 곳에 고요히 서서 노엘을 바라보았다.

“폐하께서 당신 이름을 알려주셨어요. 난 이베르 로랑이라고 해요.”

“알고 있어. 주변에서 당신 이야기밖에 안 하는데 어떻게 모르겠어?”

말을 해 놓고 보니 너무 신경질적이었던 것 같다. 노엘은 속으로 제 머리를 쥐어박으며 후회했으나 이베르는 엷게 웃을 뿐이었다.

“그런가요? 제가 오랜만에 돌아오니 반가워서 다들 그러셨나봐요.”

“오랜만에 돌아왔다고?”

“네. 지난 겨울이 끝날 때에 떠나 이제야 돌아온 거예요. 긴 여행이었죠.”

“왜 여행을 간 건데?”

“이야기를… 찾으러요.”

노엘은 무언가를 더 묻고 싶어졌으나,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는 이베르의 옆얼굴이 유독 쓸쓸해 보여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눈송이처럼 흰 은발을 가진 사내가 노래하듯 읇조린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떠나보내다가 돌아왔지요. 수천의 불꽃과 수만의 눈물을 매만지며….”

노엘은 그의 말 속에서 슬픔을 느꼈다. 무언가 위로라도 해 주고 싶어도 말주변 없는 노엘로서는 이 말이 최선이었다.

“여행이 별로였던 모양이네.”

이베르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사르르 웃는다.

“그건 아니에요. 사랑스러운 동행인들도 있는걸요. 무엇보다 제가 본 이야기들은 전부 아름다웠으니까.”

희고 마른 뺨이 웃음기에 봉긋해지는 것이 보기 좋았다고, 노엘은 생각한다. 그는 영문도 모른 채 부끄러움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여행 얘기… 해 줘.”

“그럼요.”

 

장미 정원에서 이베르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노엘의 일과가 되었다. 볕이 가장 따뜻한 오후 두 시쯤에 장미 정원으로 나가면 앙상한 관목 사이에 그가 있었다. 그들은 흰 가제보에 앉아 잎도 꽃도 없는 정원의 정경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노엘은 오래지 않아 이베르의 여행이란 것이 보통의 여행을 일컬음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가 해 주는 이야기들의 시간과 공간이 지나치게 뒤죽박죽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야기의 시점도 모호하여,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사연들조차 이베르는 전부 알고 있었다. 노엘은 자신이 눈치챈 것에 대해서는 함구하였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작은 왕국에 머물다 보면 보통이 아닌 것들을 많이 만나게 되기 마련이었다. 이 왕국에는 이베리아 반도의 악마도, 고대 그리스의 영웅도 있다. 어딘가 이상한 여행을 하고 돌아온 남자 정도는 별 것 아니었다.

노엘은 점차 이베르 로랑에게 익숙해졌다. 어느 날은 기타를 들고 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현을 튕겨 보기도 하고, 또 어느 날은 자신이 쓴 악보를 보여 주기도 했다. 이베르가 나무를 엮어 만든 바구니에 홍차와 과자를 챙겨와 노엘에게 대접하는 날도 있었다. 홍차는 그렇게까지 입에 맞지 않았지만, 잼이 들어간 쿠키는 맛있었다. 노엘은 점차 이베르에게, 그의 이야기에, 그가 내린 홍차 맛에 익숙해졌다. 그의 친구라는 두 소녀와 안면을 트고 자신의 노래를 들려 주었다. 이베르 로랑은 노엘의 일상이 되었다.

 

날실은 자아지고….

 

계절은 겨울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데, 쌓인 눈이 다 녹아 맑고 쾌청한 어느 늦겨울. 이베르는 노엘에게 미뤄 왔던 말을 꺼내야만 한다.

“노엘.”

“응?”

“이제 곧 작별이네요.”

노엘의 얼굴에 엷게 걸려 있던 미소가 씻은 듯 사라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겨울이 끝나가잖아요. 다시 떠나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는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잖아.”

“나는…. 겨울과 함께 떠나 겨울과 함께 돌아와요. 항상.”

“왜 그래야 하는데?”

“이야기를 찾으러요.”

“그러니까, 왜 그래야 하냐고!”

노엘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때맞추어 불어온 서늘한 바람이 노엘의 머리칼을 거칠게 흔들고 지나갔다. 그 바람의 끝자락에는 한 줄기의 부드러운 기색이 서려 있다. 이베르는 저도 모르게 조금 슬픈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는 노엘을 따라 일어나 노엘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해야만 하는 일이에요. 미안해요.”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며, 노엘은 진정하기 위해 애썼다. 그가 떠난다고는 했으나 돌아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겨울과 함께 돌아온다고 했으니, 세 계절만 지나면 다시 만날 수 있는 것 아닌가. 아니, 애당초 이베르가 떠나는 것으로 이렇게 흥분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그가 나에게 무엇이길래? 그저 두어 달 알고 지내며 적당히 친해진 사람이다. 잠시 떠났다가 다시 돌아올, 소중하지 않은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열을 낼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러나….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애달픔이 노엘의 가슴을 두드리고 있었다. 참을 수 없었다. 그가 떠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슬픔과 고통이 분노가 되어 노엘을 떠밀었다. 그는 이베르의 멱살을 잡아챈다.

그리고 보았다.

거칠게 당겨져 드러난 목덜미의 살이 참혹하게 썩어 있는 것을.

노엘은 저도 모르게 쥐었던 셔츠 자락을 놓고 뒷걸음질쳤다.

“그게…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노엘….”

이베르는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임시 육체가 썩어들어가는 것은 빈말로도 유쾌한 광경이 못 되었다. 보통의 현대인 수준의 비위로는 견디기 힘들 것이다. 그는 노엘이 구역질을 하며 뛰쳐나간다 해도 상처받지 않을 마음을 먹었다.

“아, 아프지 않아?”

그러나 노엘이 꺼낸 말은 이것이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미간을 찌푸리고, 두 손을 어찌 둘지 몰라 허공에 둔 채로 이베르를 걱정했다.

“그라산도 알아? 이거, 의사한테 보여야 하는 거 아냐? 내가 말하고 올까?”

“아, 아니에요. 그럴 필요 없어요.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에요, 노엘.”

이베르는 재빨리 목깃을 정리하고는 노엘을 토닥여 앉혔다. 노엘은 눈 앞에서 큰 사고를 목격한 사람처럼 안절부절 못했으나 순순히 이베르의 말을 들었다.

“…오늘의 이야기는 이게 좋겠네요. 태어나지 못한 소년과 이야기를 찾는 여행.”

노엘은 직감적으로 그것이 이베르의 이야기임을 알았다. 이베르의 창백한 입술이 이야기를 빚어낸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느 전쟁. 태어나지 못한 소년. 무덤에 묻힌 쌍둥이 인형. 지평을 떠도는 여행자. 그는 겨울에는 머물 수 있으나 몸이 썩어가기에 다시 떠나가야 한다.

이야기를 마친 이베르가 눈을 들자, 눈이 새빨개져서 울음을 참고 있는 노엘이 보였다. 이베르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노엘이 입을 열었다.

“외롭지 않았어?”

이베르는 말을 잊는다. 외롭지 않았느냐고?

삶과 죽음에 경계에서 흔들리며 걸어나가던 모든 시간이 외로움이었다. 오르텐스와 비올레트의 손을 잡고 걸었으나 근본적인 고독은 채워지지 않았다. 그를 스쳐가던 수많은 이야기. 그를 떠나가던 수많은 삶.

그러나 제 동생을 위해 사라지기로 마음먹었던 그 순간에는 외롭지 않았었다.

그러니 지금도, 눈 앞에 그가 있으니, 외롭지 않을 수 있었다.

이베르는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이제는 외롭지 않아요.”

“돌아오는 거, 확실한 거지?”

“그럼요. 겨울과 함께 돌아올 거예요.”

노엘이 엉망인 얼굴로 웃음 비슷한 것을 만들어 보였다. 이베르는 그 웃음에 용기를 내 보았다.

“그러니… 그때까지 저를 기다려 주실 거죠?”

짧은 망설임 끝에 건넨 질문이었는데, 노엘은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확신에 찬 대답을 돌려주었다.

“당연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