뻘겋게 달아올라 쏟아질 듯 펄럭이는 저녁놀. 그것은 사내의 머리 위에 승전을 알리는 깃발처럼 도사린다. 구영은 대전 안에 서서 사내가 걸어 들어오는 것을 지켜본다. 피 묻은 군홧발이 흰 대리석 바닥을 더럽히고, 압도적으로 붉은 노을빛 탓에 사내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뒤덮여 있었다.
제국식의 갑주를 입은 사내는 말 없이 손에 든 수급을 내밀었다. 목이 잘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도 뜨거운 피가 떨어지는 황제의 머리에는 고통과 반항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피는 노을처럼 붉다.
구영에게 바치는 류원청의 사랑처럼, 붉다….
이민족 사내 류원청은 큰 어려움 없이 명희왕부의 일원이 되었다. 신부 위장이라는 큰 사건과 함께 등장한 것치고는 그랬다는 말이다. 왕야를 향한 충성심이 지나친 나머지 그에게 시비를 걸거나 대련을 빙자한 싸움을 요청한 이들이 있기는 했지만, 류원청은 그것들을 요령 좋게 받아넘기고 때로는 꺾어 가며 왕부에 녹아들었다. 명희왕 구영을 섬기는 신하들은 이제 이 이민족 부마를 꽤 좋아하게 되었다. 농담 삼아 그를 공주님이라 부르는 이들도 생겼을 정도였다.
류원청은 특히 무관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왕부의 무관들은 원청이 직접 빚은 마유주를 얻어 마시거나 그에게서 유목민 식의 주사위 놀이를 배우곤 했다. 원청의 궁술을 견식하거나 서로의 검술을 나누는 것은 물론이었다. 그 과정에서 류원청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듣게 되었다.
“그게 정말인가?”
현덕이라는 이름의 무관이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구간 뒤편에 작은 모닥불을 피워 놓고 동그랗게 모여 앉아 있던 차였다. 육포 따위를 굽던 다른 무관들도 하나같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말이고말고! 지금의 황제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알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일세. 듣기로는 높으신 분들께서도 이미 갈아탈 준비를 마쳤다던걸.”
“갈아탄다? 누구에게로?”
“그거야 난 모르지.”
“뭐야, 이 실없는 사람.”
현덕과 원청이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마유주를 한 모금 마시며, 현덕이 나직하게 중얼거린다.
“참 아쉽단 말이야. 우리 왕야께서 황실의 직계셨더라면 좋았을걸. 저렇게나 영민하신 분인데.”
그 순간 원청의 머릿속에 하나의 심상이 움텄다. 지나치게 무도하고 위험한 상상이었지만 류원청은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구영의 흰 얼굴 위로 드리운 면류관의 옥구슬을 떠올리니 마음이 들떴다. 그 구슬들을 거두고 영의 입술에 입을 맞출 수 있다면.
원청은 무릎을 짚고 일어나며 싱긋 웃었다. 오래도록 웅크리고 있었던 그의 늑대 같은 영혼이 마침내 기지개를 켜는 순간이었다.
왕의 부마 된 자는 의외로 할 일이 많았다. 왕부를 돌보는 일은 원청에게는 무리인지라 다른 이들이 나누어 맡아 주었지만, 대외적인 활동에는 반드시 그가 동행해야 했다. 영이 황궁의 대신들이며 황족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원청은 장군들과 말을 달리며 친교를 쌓았다. 유익한 시간이었다. 원청은 군의 실권을 쥔 이들과 교분을 나누며 그들이 황제에게 가진 불만을 확인했다. 사냥터로 관리되고 있는 작은 숲속에서 은밀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변방의 고질적인 흉년과 부족한 지원. 장안에서 매일같이 벌어지는 화려한 주연에 대한 박탈감. 황제에게는 적이 많았다. 원청에게 있어서는 희소식이었다.
모든 일은 막후에서, 그러나 확실하게 진행되었다. 원청은 국경을 지키는 장군들과 작전을 세웠다. 황제로 영을 추대하자는 말에는 약간의 반대가 있었지만, 설득이 어렵지는 않았다. 영은 평판이 좋았으며 적당한 수준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대장군들은 그 점을 선호했다. 원청은 영을 황제로 올린 뒤 그들을 쳐낼 생각을 하면서도 웃는 얼굴로 비위를 맞춰 주었다.
류원청이 명희왕부에 도착한 지 이 년이 조금 넘었을 무렵에는 이미 반역을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나 있었다.
초여름의 어느 밤, 영은 오른편에 누운 원청에게 잠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창문 너머로 싱그러운 밤바람이 불어와 그들의 벗은 어깨를 간질이고 있었다.
“이상한 일을 꾸미고 있지.”
“무슨 말씀이신지?”
어둠 속에서 원청이 흉터 있는 눈썹을 찡긋하는 것이 보였다. 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나를 바보로 보는 건가? 황궁이며 대장군부에 갈 때마다 늙은이들과 모여 쑥덕이고 있잖아.”
“하하, 사냥 얘기를 하는 것뿐이오. 서방님이 이상한 오해를 하시는군.”
원청은 영을 놀리고 싶을 때면 서방님을 운운하며 그에게 엉겨 붙곤 했다. 영은 못 이기는 척 그를 끌어안았으나, 표정을 풀지는 않았다.
“이상한 일 하지 마. 위험한 일도. 무도한 일도.”
원청은 아주 재미있고도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 끝에 입맞춤이 뒤따른다. 원청은 영의 이마에 거친 입술을 댄 채 속삭였다. 영이 반사적으로 눈을 감으면 이내 눈꺼풀 위로도 입술이 내렸다.
“걱정 마. 나는 당신에게 해가 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아.”
며칠 후, 류원청은 친분을 쌓은 장군의 초대를 받아 남쪽의 변방으로 외유를 떠났다. 그는 칠 일 이내에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겼고, 그 말을 지켰다. 명희왕의 부마를 위시로 한 역도들의 무리는 칠 일만에 수도를 함락하고 황궁에 발을 들였다.
남쪽의 변방으로부터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첫날, 구영은 거의 이성을 잃은 채로 하루를 보내야 했다. 위기에 빠진 나라를 염려하는 충심으로 인함은 물론 아니었다. 원청이 그의 곁에 있었더라면, 영은 반란이 아닌 외침의 소식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원청이 강인하고 요령 좋은 사내임을 알고 있었으나 그가 역도들에게 휩쓸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걱정을 떨치지 못했다.
이틀이 더 지나는 동안에도 류원청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역도들이 무서운 기세로 밀고 올라온다는 소식은 하루에도 십수 번씩 들려오는데, 명희왕이 온 영향력을 동원해 수색을 벌여도 그의 부마를 찾을 수는 없었다. 영은 지난 사흘 동안 눈에 띄게 살이 내렸다.
침소 밖이 소란했다. 황제가 황실의 피를 이은 자들을 모두 황궁으로 불러들였기에 왕부의 모든 식구들이 짐을 꾸리느라 분주하던 차였다. 영은 생기 없는 눈으로 초여름의 풍경을 바라본다. 흐드러진 신록의 연두와 햇살의 금빛. 눈이 아플 정도로 반짝이는 어린 잎사귀들…. 그러나 그 무엇도 영에게 감흥을 주지는 못했다.
구영은 류원청을 생각한다. 그가 언제부터 자신에게 이토록 깊이 뿌리내렸는지를, 그가 사라진 자리가 왜 이토록 고통스러운지를.
한 침상에서 잠드는 것도 몸을 섞는 것도 일상의 모든 것을 공유하는 것도 당연한 사이였으나, 영은 원청이 자신에게 있어 무엇인지를 아직 몰랐다. 부마라는 호칭을 내려 주었으나 진정으로 그를 자신의 반려라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인가? 연인처럼 구는 동시에 때로는 악우 같은 남자. 입을 맞추고 끌어안으나 때로는 지도를 펴 놓고 군략을 논할 수 있는 남자.
류원청. 너는 뭐지? 나를 어떻게 할 셈이지?
마차로 꼬박 이틀을 이동한 끝에, 반란으로부터 닷새. 구영은 황궁에 도착해 곧바로 황제를 알현했다. 대전 양편으로 도열한 신하들 사이를 걸어 나아간 구영이 옷자락을 젖히며 무릎을 꿇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어서 오라, 명희왕.”
황제는 중키에 약간 마른 듯한 노인으로, 탐욕스러운 눈빛과 구부정한 자세를 가진 이였다.
“무도한 무리의 반역으로 심려가 크시지요. 마음만 같아서는 당장 칼을 뽑아들고 역도의 무리를 섬멸하고 싶사오나 가진 바 무재가 일천하여 그러지 못하니 송구하옵니다.”
구영이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이며 읍했다. 황제는 그의 매끄러운 말이 듣기 싫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됐다. 그런 말 할 필요 없느니라.”
“하오면….”
“군대를 내놓아라. 왕부의 장수들과 무장병 이천을 받겠다.”
영은 담담한 낯을 유지하며 그러겠노라고 답했고, 황제는 만족하며 그를 물렸다. 영은 그의 뒤를 이어 명친왕이 대전에 드는 것을 보며 제 몫의 궁으로 향했다. 역도들이 무서운 기세로 진격하고 있음에도 황제는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선황의 외아들로 날 때부터 제위가 정해져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의 인생에서 두려움을 느낄 만한 일이 무엇이 있었겠는가? 아마 그는 작금의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구영은 담담하게 죽음을 생각했다. 반역자들의 무리는 점차 세를 불리고 있었으며 심상치 않은 속도로 장안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중앙군의 부패가 얼마만큼 심각한지는 이미 알고 있는 바. 장안의 함락은 예정된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역도들은 사흘 내로 이 땅을 밟을 것이다. 살아남을 방법을 고민해야 할 때였다. 그는 지켜야 할 이들이 있었다.
그런데도 류원청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반란으로부터 이레, 해질녘. 장안을 둘러싼 성벽이 무너졌다는 전갈이 도착한 순간 황제는 몸을 돌려 대전을 빠져나갔다. 늙은 환관 하나만이 그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대신들은 겁에 질려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기에 바빠 황제의 뒤를 쫓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구영은 다른 왕들과 함께 모여 있다가 이 소식을 들었다. 그는 당장에 대전으로 향해 황제를 알현하고자 했으나, 이미 황제는 자리를 뜬 지 오래였다. 대신들 중 누구도 그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영은 도리어 안도를 느꼈다. 이런 소란 중에서라면 부하들과 함께 몸을 빼낼 수 있을 터였다. 그가 소란을 등지고 몸을 돌리는 순간, 대전의 문이 열리며 핏빛의 노을이 쏟아져 들어왔다.
영은 강렬한 빛에 눈살을 찌푸리면서, 대체 누가 이토록 무도하게 들이닥치는가 하고 생각하였다. 뒤늦게 피비린내가 자욱하게 퍼졌다.
비단 관복을 입은 자들이 천박하게 떠들던 소리가 점차 잦아들고, 공포에 젖은 침묵이 내리깔렸다. 영은 빛에 적응한 눈을 들어 무엇인가를 손에 든 한 남자를 바라본다.
숨이 멎는 듯 하였다.
황제의 목을 든 류원청은, 명희왕부의 후원에서 그와 장난칠 때와 똑같은 낯으로 환히 웃는데….
“내가 말했지. 당신에게 해가 되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고. 이레만에 돌아오겠다고.”
원청의 양손은 생피에 젖어 붉다. 그것은 그가 영에게 바치고자 하는 마음과 꼭 같은 빛깔이었다. 새빨갛고 뜨거운 것. 노을처럼 압도적이고 강렬한 것.
수천 수만을 죽여서라도 건네고 싶은.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