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화환을 든 오필리아
딱복2025-04-25 00:13

초가집 마루에 앉으면 산과 산 사이의 골짜기로 저무는 노을이 곧장 바라다보인다. 좁다란 안뜰에 햇살이 붉게 쏟아지고 하늘로부터 출발한 바람이 산으로 불어닥쳐 나뭇가지를 흔드는데, 빨랫줄에 걸린 치마저고리가 깃발마냥 펄럭이고 있었다. 이휘명은 무릎에 시집을 올려둔 채로 소금기둥처럼 가만하다.

그는 신우혁을 생각했다. 지주댁 도련님답지 않게 크고 거칠던 손과 그 안에서 아주 작게만 보이던 바이런의 시집을.

‘그러고 보면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집도 문고판이었지.’

도쿄의 전차 안에 구부정하게 서서, 혹은 현해탄을 건너는 배의 갑판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문고판 시집을 읽는 신우혁의 모습이 머릿속에 퍽 그럴싸하게 그려졌다. 그는 키도 덩치도 큰 사람이니 천정이 있는 곳에서는 머리를 숙여야 하리라. 이휘명은 고개를 떨어뜨리며 픽 미소짓고, 그 직후 스스로가 웃었음에 놀란다. 혼자 있을 때에 웃은 것은 아내의 관을 내린 이후로 처음이었다.

문득 산바람이 강하게 불자 여덟 폭 치마가 크게 들썩여 이휘명의 얼굴 위로 시커먼 그림자를 덮었다. 노을빛에 달구어져 있던 살갗이 순식간에 차게 식고, 이휘명은 심장이 내려앉는 감각을 맛본다.

은밀히 범한 죄를 신의 눈 앞에 모조리 들킨 최초의 인류가 이러한 두려움을 느꼈을까?

골짜기 사이로 흘러내리는 낙조는 피처럼 붉고 선명해, 그 가운데서 눈동자처럼 흰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 이휘명은 등을 웅크린다. 죄악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아내가 없는 세상에서 숨을 쉬고 음식을 먹고 웃고 살아가는 것이 모두 기만 같았다. 삶의 모든 순간들이 사랑에 대한 배반이었다. 그는 아내의 마지막 부탁으로 인해 죽지 못한다. 열에 들떠 갈라진 창백한 입술로 속삭이던 아내의 얼굴,

‘오래, 행복하게 오래 살아요.’

그 말이 유일한 주박으로 남아 그를 살게 했음에도.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피로한 일이라.

이휘명은 매일같이 여러 방법으로 죽어갔다. 때로는 숨이 막히고 때로는 불에 타는 듯 아프고 때로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추웠다. 그 고통이 응당 겪어야 할 일처럼 느껴졌다. 삶이란 징벌이로구나…. 이휘명은 노을을 오래도록 응시하다가 눈이 시려 시선을 내린다.

해가 떨어지면 날이 추워져 천이 상할 것이다. 그는 옷을 걷으려 일어나며 마루 위에 시집을 올려두었다. 저고리와 치마를 걷어 개는 내내 큰 바람이 불었고, 새가 홰를 치듯 종이가 한참 팔락거렸다. 옷을 다시 봉하여 두고 마루를 돌아보면 책이 펼쳐져 있었다. 시 한 편이 그를 기다리듯 놓였다. 이휘명은 가만히 글을 읽고, 천천히 그를 자신의 말로 곱씹는다.

Oh! snatched away in beauty’s bloom. *

“… 오, 아름다움이 피어날 적에 져버린 그대여.”

잠든 그대 위에 묘석조차도 놓이지 못하게 하리라. 소리내어 읊어 보자 눈물이 흘렀다. 이휘명은 종이가 동그랗게 젖어들 때에야 비로소 자기가 우는 줄을 알았다. 이 또한 웃음과 마찬가지로 아주 오래간만이었다. 피를 본 후에야 자기가 다친 것을 깨닫는 아이마냥 그는 새삼스럽게도 자신의 괴로움을 돌아본다.

그리워져서, 가만히 이름을 불러 본다. 입 밖으로 내면 흩어질까 몇 번이고 삼키던 이름이었다. 슬픔이 제방을 무너뜨리며 밀려온다. 이휘명은 어스름이 다 지도록 떠나간 이를 부르며 한참을 울었다. 눈물에 종이가 울어 쭈글쭈글해지고 인쇄된 잉크가 번져 책이 엉망이 되었으나 어쩐지 마음이 후련하였다.

그는 부은 눈을 깜빡이며, 빌린 책을 상하게 하였으니 사과를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이튿날 오전에 바로 집을 나섰다. 마을로 내려가는 것은 간만이었다. 코가 찡하도록 공기가 싸늘한 겨울 아침. 아이들은 썰매를 타러 간 것인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어른들은 짚신을 삼고 노름을 하느라 집 안에 틀어박혀 있는 모양이었다. 늦은 오전임에도 길을 걷는 사람은 이휘명 뿐이었다. 지주댁에 가 집안일을 보아 주는 아낙에게 신우혁 도련님을 찾는다 하자 그는 반색을 하며 사라졌다. 모르기는 몰라도 이 선생과 첫째 도련님이 친분을 쌓는 것이 집안 사람들에게 퍽 기꺼운 모양이로구나 했다.

잠시 기다리자 양장이 아닌 한복 차림을 한 신우혁이 뛰듯이 바삐 걸어나와 이휘명을 맞이했다. 풍채가 워낙에 좋으니 무엇을 입어도 태가 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솜을 누빈 청람색 마고자를 덧입은 신우혁이 어쩔 줄을 몰라하며 그를 사랑채로 들였다. 그는 마당을 가로지르는 짧은 시간 동안 날이 추운데 세워 두어 미안하다며 몇 번이나 사과를 했다. 이휘명이 엷게 웃음기가 깔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피차 장성한 사내인데 잠깐 기다린 것이 무어 대수라구요. 이리 죄송스러워 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래도 오늘은 유독 날이 춥잖습니까. 오래 서 계신 것은 아니지요?”

“아주 잠깐이었습니다. 새해가 가까워지니 공기가 차갑기는 하네요.”

댓돌 위에 신발을 벗어두며 날씨에 대한 애기를 잠깐 나누고, 둘은 며칠 전 이휘명의 집에서 그러했듯 좌상을 가운데에 두고 앉는다. 이휘명이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밀며 사과의 말을 건네려던 그 때에, 신우혁이 문득 인상을 찌푸리며 그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이 선생, 혹시 울었습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이휘명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다물며 눈을 몇 차례 깜빡거리곤 얼뜨기 같은 대답을 하고 만다.

“표가 납니까?”

이휘명의 그 맥빠지는 답도 긍정이 되는지 신우혁은 여전히 심각한 낯이었다. 다 큰 성인 남자가 홀로 운 것을 모른 척 해줄 법도 한데, 그에게 있어서는 체면보다는 염려가 우선인 모양이었다. 이휘명은 찰나 고민하다가 솔직해지기로 마음먹는다.

“간만에 내자의 생각을 하니 눈물이 나오더군요. 부끄럽습니다.”

신우혁은 당황하거나 어찌할 바를 모르는 대신 정중하게 실례를 사과했다. 그들 사이에는 감사와 사과가 참 많이도 오갔다. 이휘명은 거기에 또 괜찮다는 사양을 가져다 붙인다.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실례가 많습니다…. 둘은 그러다가 문득 웃어 버리고 말았다. 소낙비처럼 짧은 웃음이었으나 분위기가 산뜻하게 환기되었다. 이휘명은 언뜻 웃는 낯이 되어선 책을 건넨다.

“시집을 참 즐거이 읽었다는 말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종이가 눈물에 울어 죄송하다는 말도…. 이런. 또 사과로군요.”

다시금 스치는 웃음. 신우혁의 목소리에는 따스한 기운이 깃들어 있다.

“괜찮습니다. 귀한 판본이었다면 화를 냈겠지만 문고판인걸요. 보나마나 종이도 싸구려겠지요.”

“그러고 보니 주신 시집이 다 문고판이더군요. 여기저기 다니며 책 읽는 것을 좋아하시는 모양입니다.”

신우혁이 고개를 끄덕인다.

“동경에서는 전차에서 책을 그리도 많이 읽었습니다. 내릴 정류장을 놓치는 일도 왕왕 있을 정도로요.”

이휘명은 자신의 내심 짐작이 맞았음에 또 조금 웃는다. 분위기가 누긋하고 따스해진 것을 느낀 신우혁은, 다소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말을 꺼낸다.

“아. 동경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며칠 후에 경성에서 제대 동문 모임이 개최된다고 합니다. 이 선생에게는 소식이 닿지 않았을 것 같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신우혁은 자각도 없이 마른침을 삼키고, 마치 연애를 거는 고보 학생처럼.

“같이 가시겠습니까?”

혹은 얼뜨기 청년처럼 이리 말했다.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던 이휘명은 신우혁의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산뜻하게 긍정한다.

“그러지요.”

너무도 선뜻 나온 대답인지라 신우혁은 이유도 없이 의표를 찔린 사람마냥 당황하였다. 내밀한 속내가 입술 사이를 비집는다.

“거절하실 줄 알았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이휘명의 낯은 겨울날의 해그늘처럼 맑아 한 점 흔들림이 없는데도.

“괴로운 추억과 닿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랬습니다.”

이휘명은 부정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긍정하지도 않았다. 이어지는 대답에는 한 주제에 대해 오래 숙고한 자 특유의 부드러운 확신이 깃들어 있다.

“지금에 와 돌이키기에 괴로운 것은 사실이나, 제대 시절이 제게 가장 빛나던 시절이덥니다. 그러니 온전히 묻어두고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어떠한 변화가 목전에 찾아왔음을 두 사람 모두가 알았다.

“그러니 가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신우혁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곤 떠나는 날이며 체류 기간 따위의 일정을 일러 주었다. 이레 후에 출발해 경성에서 나흘을 머물다 돌아오는 짧지 않은 여행길. 이 선생은 여전한 죄악감을 가슴 아래에 가라앉히고, 감히 기대감을 품는다. 신우혁을 만난 이후로 그의 단조로웠던 일상에 새로운 바람 같은 것이 불어닥치는 기분이었다. 그를 배웅하고 돌아서 문지방을 넘는데, 이휘명은 자신이 고통스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랬다. 이휘명은 근래에 들어 이따금 죽음과 괴로움을 잊었다. 가끔은 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경성행을 위해 여행가방을 꺼내 먼지를 털고 옷을 개키는 과정이 즐거웠다.

어떠한 예감이 성큼성큼 다가와 이휘명의 뒷덜미를 채었다. 그것은 불안할만큼의 환희인 동시에 친숙한 두려움이었다. 가슴 속에서 더운물이 차오르는 것만 같은 감각. 누군가의 뒷모습만 바라보아도 웃음이 나는 기분. 이휘명의 인생을 이미 한 번 뒤바꾸었던, 사랑의 전조. 이휘명은 입지 않은지가 오래 된 양장 셔츠를 개켜 가방에 넣으며 그 예감도 묻어두었다. 아직은 너무 일렀다.

그러나 이레가 지나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마음은 어떠했던가. 소달구지를 얻어 타고 산아래로 내려가 역에서 열차를 기다릴 때의 그 즐겁던 기분은? 열차 안에서 마주보며 앉아 책을 읽으며 신우혁의 눈썹뼈 아래로 드리운 그림자와 내리뜬 눈을 훔쳐보던 이유는 무엇인가.

페이지를 기억해 펼친 책은 셰익스피어의 햄릿. 오필리아가 나뭇가지 끝에 올라 노래하고 있다. 옷자락을 수면에 늘어뜨린 그는 곧 익사하게 될 것이다. 신우혁이 시선을 들어올린다. 눈이 마주치면 웃음이 이어진다. 이휘명은 찰나 공포에 질렸다.

아직은 너무 일렀다.

그러나 그는 반드시 익사하게 될 것이다.

 

*바이런의 동명의 시